밤낮으로 착실하게 예불과 염불 하는데 느슨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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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으로 착실하게 예불과 염불 하는데 느슨함이 없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8.12.2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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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②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2) 1882년~1900년 초
여기에서는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을 중심으로 해서, 진원일(1916-1987)의 기술과 필자가 채록한 구술을 참고로 하여, 비교 검토한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

중년(中年)부터 다행히 대단월(大檀越)인 화주(化主)가 되어, 밤낮으로 착실하게 예불과 염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느슨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애감통(無礙感通)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부처님 전에 지성을 다하고 믿었으며, 더욱이 집에 천금(千金)을 쌓아 두어도 결국 몸을 지옥에 빠뜨리는 좋은 먹이가 될 것이요, 마음에 하나의 선을 쌓으면 마침내 천상에 오르는 좋은 다리가 될 것이라는 마음을 내었다. 그리하여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부지런히 여기저기 참방하던 중,…….

2가지 주요한 내용이 언급된다. 하나는 봉려관이 출가수계하기 전에 이미 막힘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 둘은 내면에 선을 쌓아나가야 한다는 선행수행(善行修行)의 중요성을 봉려관이 갖게 되었다 이다. 
그러나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후대인(後代人)들의 오해를 야기한 번역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즉 봉려관이 현가(玄家)를 나올 때 천여 량의 돈을 가지고 나왔다는 이 부분이다. 진원일은 ‘尤發 家積千金竟作陷身之芳餌, 心存一善終作上天之良橋’를 의역(意譯)하기를 ‘집에 모아 두었던 돈 천여 량을 가지고 와서 기도와 자선사업을 하여 죽은 뒤에는 좋은 곳에 태어날 준비를 했고, 마음속으로 늘 착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천국에 갈 수 있는 큰 복을 지었던 것이다.’고 한다. 후일 중앙포교당 소유권재판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가 이 번역오류에서 기인된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이후 봉려관의 생애 언급 時에, 다수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봉려관이 집에서 ‘천여 량’의 돈을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千金’은 ‘큰 돈’ ‘많은 돈’ ‘귀중한 것’을 의미한다. 윗 문장에서 이것을 ‘천 냥(兩)의 돈’ 혹은 ‘천량이나 되는 금’으로 직역하는 것은 무리이다.      

진원일이 기술하길,

18세 되는 서기 1882년 봄,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현국남(玄國南)씨와 결혼해서 1남 4녀가 있었으나 모두 고인이 되었다. 아들 현종식(玄鍾植)씨는 일찍이 면장과 동척주식회사 전무, 식산은행 지점장 등을 지냈다고 한다. 손자 한 분과 외손자 남매 4분이 현재 생존하고 있다.  

진원일은 봉려관이 출가 전, 자녀가 1남 4녀라고 한다. 그러나 봉려관과 함께 생활했던 재가제자와 즉금의 두옥문도는 1남 3녀로 알고 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아들은 현종식, 딸은 현경화, 현경우, 현목련이다. 현종식은 결혼하여 재가자(在家者)의 삶을 살았고; 현경우(玄俓友), 현경화(玄俓化), 현목련(玄木蓮)은 모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현종식(1894-?)은 당시 제주불교재건에 동참한 흔적이 있다. 제주불교협회 창립과 중앙포교당 창설 시주자 명단 등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현종식에게 아들이 있고, 현국남의 손자가 중앙 포교당를 상대로 재산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으며, 1964년에서 1965년쯤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현경화(1889-1940)는『법기문도계보』에 의하면, 1889년 10월 17일 출생했으며, 출생지는 제주도이고, 1926년 금전(錦典)스님을 은사로 석두화상(石頭, 효봉의 은사)을 계사로 득도(得度)했다. 경화는 출가명(法名)으로 사용되었다.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10년 안거를 했고, 1940년 3월 6일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입적하였다. 법납은 14년이고, 회명이 내린 법호는 대련(大蓮)이다. 경화의 수계제자로는 탄행(坦行)이 있고, 수계손제자로는 혜선(慧禪), 법성(法性), 혜능(慧能)이 있다. 현경화가 어떤 경로로 금강산 법기암 문중으로 들어갔는지 그 기록은 없다. 현 제주 관음사 주지 허운은 “회명스님의 소개로 청룡사 문중과 연결이 된 것 같다”고 한다.『회명문집』에는 1933년 10월 회명이 작성한「동대문구 숭인동 청룡사 연역」이 있고, 이 중 당시 대중명단이 첨부되어 있는데, 홍상근(1872-1951)의 상좌로 경화(俓化)가 있다(pp.161-162). 또 회명이 계유년 68歲時(1933년)에도 “서울 흥인문(동대문) 밖의 청룡사의 연역을 초하여 기록하고 홍상근비구니의 행장을 지었다”(p.367)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회명문집』의 기록과는 달리『법기문도계보』에는 경화가 홍상근과 자매관계인 금전의 상좌이다. 현 청룡사 주지 진홍은 경화가 청룡사와 인연이 된 연유는 “경화스님이 금강산을 둘러보러 왔다가 법기암에서 인연이 맺어진 것으로 유추한다”고 한다.  
현경우의 승적(僧跡)과 관련된 자료는 현재 없다. 세간에 은사가 봉려관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다. 현경우는 일찍이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회명이 내린 법호는 정호(正湖)이다. 그리고 경화와 경우가 결혼했다는 언급은 없다. 
현목련(1900-1941)은 결혼해서 2남 2녀를 두었고, 봉려관 생존 時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은사는 안봉려관으로 알려져 있다. 목련의 출가는 막내 오정순이 태어난 1936년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출가수계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입적한 것 같다. 오영호의 구술에 의하면, 현목련의 차남 오남규(1929-1949)는 매우 명석하였고, 수재들이 모인다는 제주농협학교에서 전교 1, 2등을 하였으며, 중학교 3학년 때 영어가 능통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주도의 아픔인 4‧3 사건 때, 정뜨르 비행장(지금의 신제주 공항)에서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총살시킨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총살당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오남규이다. 재적등본에 의하면, 현목련은 1941년 8월 10일 오후 2시 삼도리 제주도립병원에서 입적했으며, 가족증언에 의하면 입적원인은 제주방언으로 호열병(好熱病)이라는 병으로 인해서다. 
현국남(1860-1948)은 후에 부처님께 귀의했고, 관음사에서 재가제자로 활동한 흔적이 있다. 
진원일은 또 이르길,

봉려관 스님이 35세 되는 서기 1899년 가을철에 어떠한 고승(高僧)이 스님을 찾아가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불상(佛像)을 바랑 속에서 끄집어낸 후 스님에게 주면서 “이것은 관세음보살상인데 당신은 이 보살상(菩薩像)을 방안 깨끗한 곳에 잘 모시고 아침저녁은 물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부지런히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 아들딸이 단명할 것이니 그리 알라!”하면서 가 버렸다.

봉려관 삶의 큰 전환점이다. 진원일의 기술(記述)에 의거하면, 불상을 받은 봉려관은 그날부터 방 안에 모시고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염송(念誦)했고, 이로 인해 현국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봉려관의 관음정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집을 나올 결심을 한다. 같은 마을에 집을 구입한 후 불상을 모시고 혼자 살며 부지런히 염불을 한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은 봉려관이 불교를 접하고 착실하게 믿는 신자가 된 시기를 ‘中年’이라 하고, 진원일은 이 시기를 ‘30여세부터’라고 의역(意譯)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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