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려관 스님 광제중생(廣濟衆生) 의지 수계의지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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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 광제중생(廣濟衆生) 의지 수계의지로 이어져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1.0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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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④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주제발표를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수계를 위해 제주도를 떠난 시기는? 크게 두 설로 나뉜다. 하나는 ‘1907년 9월’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 12월 1일’이다. 
먼저 ‘1907년 9월’을 언급한 것은,

• <관음사 봉려관 비문>의 원문: “丁未(1907)九月”
• 진원일: “서기 1907년 음력 9월에 중 될 생각으로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를 찾아갔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은 오이화 생존 시(時)에 작성된 것이며, 작성자는 불분명하다. 진원일의 ‘1907년 음력 9월’은,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 의거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耽羅佛敎史料>에서도 1907년 9월이라고 한다.
다음은 봉려관이 출가수계를 위해 제주도를 떠난 시점을 ‘1907년 12월 1일’로 보는 견해이다. 장연종(1924-2017)이 대표적이다. 탐라불교신문이 기획특집으로「안봉려관스님 일대기」를 연재했는데, 연종이 자료제공을 했다. 여기에서 “1907년 12월 1일 제주를 출발하여 승려가 되고저 한 안봉려관은……”고 한다. 또 연종이 감수한「안봉려관스님 일대기①」에서도 “1907년 12월 1일 제주를 출발하여 승려가 되고자한 안봉려관은……”고 한다.  
종합하면, 위에서 인용한 자료 중 봉려관 생존 時와 가장 근접한 시기에 작성된 것은 <관음사 봉려관 비문>이다. 그리고 진원일은 봉려관과 함께 중앙포교당 등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연종의 ‘12월 1일’은 연종이 근거한 문헌과 구술이 불분명해 인용이 조심스럽다. 뒤에서 언급될 대흥사까지 여정을 참조하면 ‘1907년 9월’설이 타당하다. 
   
왜 대흥사로 간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는 언급이 없고, 진원일의 글에도 언급이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신비한 이야기와 대흥사 출가수계를 연계시켜, 비범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耽羅佛敎史料>친필원고에서는,
광무 11년(1907, 정미년)에 또 관세음보살이 현몽하여 “해남군 대흥사(大興寺)로 가서 삭발하라”고 계시하였으므로 동년(同年) 9월에 대흥사로 가서…….(p.106, 태고종 제주 종무소 소장) 

두옥문도 ‘ㅅ’스님은 다른 내용을 언급하는데, 

대흥사 전(前) 주지⎕⎕스님에게 직접 들었는데, “봉려관스님이 제주도 한라산에서 공부를 했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늘에서 말하기를 ‘남쪽으로 가서 계를 받아라.’ 해서, 물어서 물어서 남쪽으로 간 것이 대흥사였고, 대흥사는 어두워서 도착했다”고 들었다.

첫 번째 내용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구술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이 내용에 근거해 9월에 제주도를 떠나 12월 8일(혹은 12월 28일) 수계까지 두 달여간의 여정 설명은 어렵다. 그러나 두 번째 구술은, 정확한 여정 설명은 없지만, 대흥사까지 두 달여간의 시간이 소요된 연유는 이해가능하다. 
대흥사로 가게 된 연유와 관련해 필자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봉려관 스님이 육지에 도착해서 정처 없이 주변 여기저기 돌아보고 다니다가, 대흥사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간 것이 대흥사였다.”는 이 내용이다.        
다음은 제주도에서 대흥사까지의 여정을 살펴보자. 우선 논급(論及)해야 할 것은 제주에서 해남으로 갔는지? 아니면 제주에서 목포로 갔는지? 이다. 하나는, 제주지역 승려(宗團不問) 대부분의 의견이며, 제주를 떠나 목포항에 도착해서 다시 대흥사를 향해 갔을 것이다 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제주에서 목포항에 도착 후 다음 행선지로 갔고, 제주로 들어오는 사람도 목포항에서 제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에서 해남 가는 배는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둘은, 제주이외지역의 두옥문도 일부는 제주에서 해남으로 바로 갔다고 한다. 만일 제주에서 해남으로 갔다면 당시 제주에서 해남까지는 여객선이 아닌 어선을 이용해서 갈 수는 있었다.
먼저 육지와 제주 간 여정을 언급한 문헌을 참조해 보자. 1924년「영주기행」은,

“8월 1일 정오(낮 12시)에 목포에 있는 제주회조부(濟州回漕部)에서 경흥환(慶興丸)이라는 기선(汽船)을 탑승하였다.……당일 정오 발묘출범(拔錨出帆)한다.……해로를 左轉하야 소안도(所安島)에 정박하였다.……이 섬을 떠날 때는 낙일(落日)이 타홍(拖紅)하야 만경파를 사례한다.……청암연(靑黯然)한 일도(一道) 中에 동남천으로 방범(方帆)한다. 성두(星斗)를 표준 한 즉 성두를 등지고 나가는 것이다. 풍성(風聲)인지 파성(波聲)인지 이변(耳邊)에서만 우루루하는 것뿐이다.……선창에 나서본 즉 피안에 등광이 성열(星列)한 것이 제주도 산지포가 분명하고 등광 뒤로 위연(蔚然)히 암취(暗醉)한 것은 아마 한라산색인가 싶다. 그러나 아직 심리산색(心裏山色)이다. 아직 야해(夜海)가 창망한 중에 한라산이 어찌 보일까?……일엽주(一葉舟)가 기선두(汽船頭)에 와서 대거늘 그 배에 나려 산지포頭에서 하륙한즉 생도 김달준이 우리를 접인 하야 전주여관에 소개하였다.”고 한다. 또 제주도에 백염(白鹽)이 부족한 사실을 전하면서 “지금은 교통이 편리하였지마는 전일에는 수로로 구백여리를 나와서 해남(海南), 진도(珍島) 등지에서 수운(輸運)하란 즉 얼마나 곤란 하였을까!”. 

즉 1924년 이전에도 목포와 제주 간, 그리고 해남 또는 진도와 제주 간의 바닷길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 2월, 백양환민(白陽桓民)의「한라산 순례」에는, 서울 남문 역을 출발해서 12시에 목포역전에 도착하여 다시 목포항에서 배를 타고 제주 산지항까지의 여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고, 10월 8일 오후 1시쯤에 목포항을 떠나 10월 9일 새벽 2시 이전에 산지항에 도착한다. 즉 반나절의 시간이 소요 된 것이다. 
1924년과 1930년 목포를 출발해 제주까지 여정과 소요시간은 별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1924년, 1930년도와 1907년의 배편상황이 동일한지가 관건이다. 한일합방 전과 후의 바닷길을 왕래하던 배편상황은 차이가 있을 것이고, 항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큰 배가 출항하는 항구는 이용인구가 충분한 도시에 설립되기 때문이다. 1907년 봉려관이 제주를 벗어나 목포로 갔다면, 1924년, 1930년 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유추한다. 그리고 도중(島中)에 예기치 못한 기상상황을 만날 경우 시간은 더 소요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백양환민도 언급했듯이 울돌목이 그 중 하나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주도를 출발해서 대흥사에 도착한 후 수계 전까지의 여정과 제주도를 벗어난 시점과의 관련성이다. 1907년 9월 출발에 초점을 맞추면 도착항이 목포일 가능성이 높고, 1907년 12월 1일 출발에 초점을 맞추면 도착항이 해남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봉려관은 대흥사에 도착해서 대흥사 산내를 돌아보는 것에 며칠, 한센병 환자치료에 3일 이상을 보내었고, 그 후 수계여부를 결정할 대중공사를 거쳐 수계(受戒)까지 며칠의 시간을 또 보낸다. 만일 1907년 12월 1일 제주를 떠나 해남에 도착해서 당일 저녁 대흥사에 도착했다고 해도 12월 8일 수계식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목포에 도착한 후 해남 대흥사도착 전까지, 그 사이에 봉려관은 여러 장소를 돌아보았고 그러던 중 해남 대흥사를 알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길을 물어가며 해남 대흥사까지 갔다는 법인의 구술을 주목해야 한다. 
또 수요승객을 고려한 도시의 크기 그리고 큰 도시와의 교통편 연결 등을 고려해도, 당시 해남, 진도, 완도는 작은 도시여서 큰 배가 왕래할 만큼 이용객 수(數)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육지와 근접한 곳은 물이 얕지만 조금만 나가면 물살이 거칠고 높아서 큰 배가 아니면 운항이 쉽지 않다고 한다. 반면 목포는 큰 도시여서 큰 배를 운항할 만한 이용여객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큰 도시와 연결이 가능한 기차역(목포역)도 갖추고 있었다. 또 예전에는 큰 부두가 목포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봉려관이 출가수계를 위해 이용한 항로는 제주와 목포를 왕래하는 배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1918년 3월 2일『매일신보』3면「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에는 “부처에게 몸을 위탁한 봉려암은 각처로 표박하야 다니다가 배편을 따라 육지로 건너셨다. 한 번 육지에 건너선 이후로는 각 사찰을 유람하야 자취를 산간에 부치고 경문을 배우며 염불을 외다가 다시 고향으로 발을 돌이키어……”고 한다. 육지에 도착한 봉려관이 각 사찰을 돌아본 후에 대흥사에 자취를 머물렀다는 내용이다.  
종합하면, 비양도를 다녀와 산천단에서 광제중생(廣濟衆生)의 의지를 비장하게 세우셨고,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겠다는 비장한 의지가 수계의지로 이어졌고, 1907년 9월 수계하고자 제주를 떠나 목포에 도착해서 각 사찰을 유람하다 대흥사를 알게 되었고 물어서 물어서 간 곳이 해남 대흥사였다. 해남 대흥사를 목적지로 정하고 간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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