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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 운대사로부터 가사 건네받아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⑤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대흥사에서 삭발 수계한 봉려관은 1908년 1월 5일 귀도(歸島)한다. 귀도한 후의 거처는?  산천단과 고향 화북 두 설이 있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은,

4월 불상을 봉안하고 재(齋)를 시설(施設)했다. 그러나 토착인 오백여명이 몰려와 모두 극력하게 봉려관을 쫓아내며 말하기를 “이런 물건을 이대로 두면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게 해서 속여 세상을 어지럽게 해 반드시 큰 화를 불러올 것이니 쫓아내야 한다.”고 하면서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봉려관 스님이 거의 불에 타 죽을 뻔 했지만 겨우 불을 피해 나오니, 천지간에 집 없는 객이라 할 만 하다.   

필자는 화재로 인해 나온 집은 산천단에 있는 집으로 본다. 1901년을 전후로 해서 이미 화북 동리에서 쫓겨 나와 산천단에 새 거처를 마련했고, 여기에서 출가수계를 위해 대흥사로 갔다. 그리고 수계 후 발생한 화재가 화북 동리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다시 산천단 거처로 가면 된다. ‘천지간에 집 없는 객이라 할만하다’고 한 것은 산천단의 거처마저도 없어져 버렸다는 것을 암시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므로 수계 후 귀도(歸島)해서 간 거처는 산천단이라고 본다. 4월에 ‘設齋’했다는 것은, 아마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가리킨 것 같다.  
산천단에서도 쫓겨 나온 봉려관은 한라산 백록담근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은,

갈 곳 없이 걸어서 가다보니, 이미 백록담 주변에 가 있었던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7일간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거의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서원하기를 “중생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죽겠습니다.” 그리고는 가파른 계곡 아래로 몸을 던져버렸다. 기이하도다! 수천마리의 까마귀 떼가 나의 옷을 물어 나를 구제하였다. 또 한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산천단으로 내려가면 저절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잡목 덤불이 우거진 곳이어서 옷을 꿰맬 것조차 없어서, 입은 옷 그대로 간신히 산천단에 도달하니, 남달리 보이는 운대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운대사는 “그대를 찾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가사를 내어서 주었다. 이 무슨 징조인가? 해를 넘겨 다음 해 기유(己酉) 봄에 한라산에 사찰(건물)을 창건했다.  

여기까지가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 마지막이다. 현재 관음사에 소재한 봉려관의 비석과 비문에 관련해서는 이하 ‘봉려관의 입적’에서 언급할 것이다.  
까마귀 떼가 봉려관을 구명(救命)한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진원일이 이와 관련해 “봉려관 스님은 어느 날 저녁에 H군과 필자를 포교당 동쪽 집으로 불러 방에 앉혀놓고 이상과 같이 이야기를 한 뒤에 궤 속에서 수 없이 많은 구멍 뚫어진 흑색 장삼을 끄집어내어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 장삼에 구멍들이 수천 마리의 떼 까마귀가 주둥이로 물고 뚫어 놓은 구멍이다! 함지사지이후생(陷之死地以後生) 이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하였다.”고 전한다. 진원일의 증언은 봉려관과 떼 까마귀의 이야기가 사실로 있었던 것임을 확신시켜 줄 뿐만 아니라, 봉려관의 인생관도 엿 볼 수 있게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봐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이 말은, 봉려관의 한 생애를 충분히 대신할만한 격언일 뿐만 아니라 봉려관의 인생관이기도 하다.

다음은 “또 한 노인이 나타나 일러주기를 ‘산천단으로 내려가면 저절로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고 하는데, 이 노인은 어디서 나타난 누구인가? 이 일화와 관련해서, 후일에는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는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는 등 신비한 요소가 부가 된다. 대중에게 흥미를 더해주고자 신비적 요소가 덧붙여진 듯하다. 이 노인에 대해서는 향후 이에 흥미를 가진 연구자의 연구결과를 기대한다.   

다음은 일명 ‘운대사’ 혹은 ‘승운대사’와 관련된 것이다. 운대사는 억측과 추측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有異僧雲大師曰望子久矣今日幸逢云而出給袈裟’라는 이 문장으로 인해서다. 이것은 앞의 문장과 함께 봐야 내용이해가 용이하다. 즉 ‘樸樕林中衣無餘縫而艱到有異僧雲大師曰望子久矣今日幸逢云而出給袈裟’이다. 하나는 이 문장의 방점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둘은 한문번역이다. 하지만 해결이 어려운 것은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이냐? 이다. 필자의 방점은 ‘樸樕林中, 衣無餘縫而艱到, 有異僧雲大師. 曰: “望子久矣, 今日幸逢”, 云而出給袈裟.’이다. 직역과 의역이 가능하다. 필자는 “잡목 덤불이 우거진 곳이어서 옷을 꿰맬 것조차 없어서, 입은 옷 그대로 간신히 산천단에 도달하니, 남달리 보이는 운대사라는 스님이 있었다. 운대사는 ‘그대를 찾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가사를 내어서 주었다.”고 번역한다. 여기에서의 운대사는 봉려관을 가사 전수자(傳授者)로 정하고 제주를 찾아온 것처럼 묘사된다. 필자가 ‘望’을 ‘찾다’로 번역한 이유는 이 운대사가 산천단에 도착하기까지 여정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望’을 ‘기다리다’로 번역해도 내용 상 큰 문제가 되지는 않다. 
지금까지의 번역은 ‘異’자를 ‘괴이하다’ ‘이상하다’로만 본 것이다. 한문의 번역은 그 문장 구성에 따라 매우 다채롭게 할 수 있다. 이것이 한문의 매력이기도 하다. ‘異’는 ‘걸출하다’ ‘남다르다’ ‘남달리 뛰어나다’ ‘기이하다’ ‘이역(異域)’ 등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異僧’은 ‘걸출한 승녀’ ‘남달리 보이는 승려’ ‘남달리 뛰어난 승녀’ ‘기이한 승녀’ ‘타향에서 온 승녀’ ‘다른 곳(또는 다른 지역)에서 온 승녀’ ‘이역(다른 지역)에서 온 승녀’ 등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異’를 꼭 ‘기이하다’ ‘괴상하다’ ‘괴이하다’로만 보지 않아도 된다. ‘望’도 마찬가지다. ‘望’은 ‘기다리다’ ‘희망하다’ ‘방문하다’ ‘찾아가다’ ‘원망하다’ ‘책망하다’ 등등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出給’은 문장 구성 상 ‘내어서 주다’로 번역해야 맞다. ‘가사 한 습을 내어 주었다’는 誤譯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승운대사’인가 ‘운대사’인가? ‘승운대사’로 볼 경우에는 ‘樸樕林中, 衣無餘縫, 而艱到有異, 僧雲大師曰 “望子久矣, 今日幸逢”, 云而出給袈裟(잡목 덤불이 우거진 곳이어서 옷을 꿰맬 것조차 없어서, 입은 옷 그대로 간신히 산천단에 도달하니, 남달리 보이는 스님이 있었는데, 승운대사라는 이 스님은 ‘그대를 찾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가사를 내어서 주었다).’이다. 문장흐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지만, 문장 연결이 어색하다. 필자는 ‘운대사’를 취한다. 이유는 일련의 과정을 진원일에게 직접 일러주셨던 봉려관이 운대사라고 언급을 하셨기 때문에, 진원일도 ‘운대사’라 기록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보현암 법선 역시 ‘운대사’라 하셨고, 봉려관의 상좌이신 국성해도 ‘운대사’라 하셨고, 국성해와 왕래가 잦았던 광주 흥룡사 법희도 ‘운대사’라 하셨고, 법인도 ‘운대사’라 하셨고, 안광호도 ‘운대사’라고 하셨다. 이처럼 봉려관과 직접적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들 모두에게서 ‘운대사’로 전해 내려오고 있어서다.
      
운대사는 누구인가? 참으로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인물은 대흥사의 ‘취운혜오(1866-?)’, ‘김석윤(1877-1949)’, ‘봉려관도 단 한 번 조우(遭遇)한 미지(未知)의 스님’이다. 취운혜오와 김석윤으로 보는 것은 ‘운(雲)’자에다 초점을 맞춘 것인데, 이 시기 봉려관과 관련된 승려 중  ‘운’자가 들어간 법명, 법호를 가진 자는 많고도 많다. 근거와 증인구술이 있음에도 이를 도외시하거나, 근거나 증인구술 채록 시도도 하지 않고, 설익은 추측을 하는 것은 학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① 취운혜오(翠雲慧悟)
먼저 대흥사 ‘취운혜오’부터 살펴보자. 이향순 교수는 “필자의 연구에 따르면, 봉려관이 산천단에서 조우한 이 노승은 대흥사의 혜오가 아닌가 한다. 혜오의 법명인 ‘취운’ 역시 ‘운’자로 끝난다. 이 추정은 봉려관의 혜오의 특별한 허가를 받아 수계 출가한 사찰이 대흥사라는 점에서 개연성이 있다”고 하며, 취운혜오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2018년 11월 이향순 교수는 필자에게 “당시 한국체류기간동안 근거할 만한 새로운 자료 수집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취운혜오의 성은 백(白)씨이며, 전남 영암사람이다. 혜오는 법명이고, 취운은 법호이다. 1907년 6월에는「대흥사 대웅전 중건기(大興寺 大雄殿 重建記)」를 작성하였고, 일제강점기에 4번(1912년 5월 11일, 1915년 6월 7일, 1923년 11월 7일, 1927년 9월 2일 취임)에 걸쳐 대흥사 주지를 역임했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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