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후기 - “예수처럼 부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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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후기 - “예수처럼 부처처럼”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1.2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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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는 단어가 불자인 나로서는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처럼’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내 시선을 끌었다. 어떻게 예수처럼 살면서 부처처럼 살 수 있을까?
평소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연구해야 한다”고 지도법사 스님께서 강조하신 적이 있는 터라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책이 저자는 예수회 신부님이었고,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을 나와 뜻밖에도 동국대학교에서 불교철학으로 석‧박사과정을 했다. 물론 본인의 자기성찰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무(無)!”
무문관 제1칙이다. 참선은 조사의 관문(祖師關)을 꿰뚫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반드시 생각의 길(心路)이 끊어져야 한다. 
어떤 것이 조사의 관문인가? 다만 이 한낱 “무(無)!”란 말이 바로 선종의 한 관문이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 ‘선종 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한다. 
“무(無)!”라는 말을 참구하라. 마치 뜨거운 쇠구슬을 삼킨 것 같아서 토하고 토해도 나오지 않게 된다. 이전의 잘못된 지식과 관념을 모두 없애서 오래도록 잘 익히면 자연스레 안팎이 한 덩어리를 이룰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삶과 죽음의 언덕 가에서 커다란 자유를 얻어 중생살이(六道四生) 가운데서도 삼매를 즐기는 것과 같다. 
저자는 무문관 1칙부터 48칙을 차례로 성서와 접목시켜 풀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전체 내용이 48개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와 불교가 문법은 다르지만, 삶의 기술(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겹쳐지는 부분이 꽤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한없이 넓고 넓은 자비와 사랑을, 불교는 좁고 험한 지혜의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리의 문’은 경쟁, 자신과의 엄청난 경쟁을 통해 얼마나 버리고 낮추느냐에 승부가 가려지는 것이고, 이 작업은 바로 ‘수행’인 것이다. 그것은 오롯이 자기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고, 이 ‘마음’이 예수와 부처가 전한 ‘삶의 기술’의 핵심이다. 
선(禪)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인 ‘무(無)’는 있다 없다의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버리고 갈까?’ 무엇을 남겼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드러나게 된다.
무(無)라는 것은 있음의 반대인 없음이 아니다. 이것은 경험을 해야 알 뿐, 그 본질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텅빈 충만’,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다보면 신기한 부분이 있다. 성서로 해석되는 공안은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한 기도, 원수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나를 성찰과 성장으로 이끌어 준다. 내 뺨을 때린 사람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아픈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맞은 뺨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몸의 언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에 담긴 핵심, 실재는 말이 아닌 상징(몸의 언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슬픔’이라는 것은 단어로 구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때문이다. 우리는 다양한 상대의 얼굴표정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이야기 중에 나무위에 올라간 삭캐오를 예수가 내려오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삭캐오는 난쟁이로 당시 천한 직업이라 여기는 세리여서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삭캐오는 부(富)를 축적하여 열등의식을 보충하려했던 것이다. 예수가 내려오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고 결별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를 축적하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사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비움과 나눔의 자비행을 실천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생각의 틀에서 죽으라.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 크게 한 번 죽어야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무문관 6칙)
무문관 15칙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를 말하며 우리 모두가 본래 주인이기에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다. 평생 주인공을 못하던 늙은 배우가 드디어 주인공이 되어 하인을 부르는데 기왓장이 놀라 떨어질 정도로 “이리 오너라!”고 하였다. 우리도 돈의 노예가 아닌, 권력의 노예가 아닌, 주인공이 될 때 이처럼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어떠한 경계도 없이 무한히 펼쳐진 허공과 어떠한 차별도 없이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심, 무변, 무애를 말하는 것이다. 습관적인 생활에서 ‘멈춤’과 ‘바라봄’, 즉 알아차림이 있을 때 새로운 습관으로 마음은 가난해질 수 있는 것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 밖으로만 향다는 빛을 되돌려 자신의 안을 비추어야 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분별도 차별도 없고 허공처럼 광대무변해서 아무런 걸림이 없다. 이런 마음을 부처의 마음 곧 불심(佛心)이라 부른다.                   /글.木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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