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부석사(浮石寺)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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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부석사(浮石寺) (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1.3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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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78)

부석사 무량수전은 한동안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졌었다. 1916년 무량수전을 해체하여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에 기록된 바로는 고려시대 말기인 공민왕 7년(1358)에 왜구들의 침탈에 사찰이 불타서 우왕 2년(1376)에 원융국사에 의해서 중수되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의 건축 양식이 고려 말보다 더 이전 양식이어서 원래 건물은 중수된 1376년보다 100년이나 150년 정도 이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본다. 사실 이보다 더 오래된 절집으로 1308년에 창건된 수덕사 대웅전이 있으나 말 그대로 그 때 창건된 것이기 때문에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1972년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을 중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발견된 상량문에 극락전이 무량수전이 중수된 때보다 13년 전인 1363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지위를 봉정사 극락전에 넘겨주게 되었다. 
 부석사에는 무량수전 못지않게 오래된 건물이 또 한 채 있다.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삼층석탑 옆으로 난 숲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단아한 작은 절집이 보인다. 바로 창건주인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조사당이다. 정면 세 칸의 작은 절집에 비해 처마의 서까래가 길게 내려뻗어 지붕이 조금 커 보이지만 그 때문에 전체적으로 작지만 다부진 느낌을 준다. 1916년 해체 보수할 때 발견된 묵서에 의하면 우왕 3년(1377)에 원융국사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창건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중수 및 보수가 지속되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1490년에 처음 중수하고, 1573년에는 지붕 보수, 1709년에는 기와를 교체하고 1916년에 완전 해체 보수하였다. 조사당 안에 그려진 범천, 제석천과 사천왕 벽화는 벽체에서 분리하여 오랫동안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알려진 사찰 벽화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계와 부처님을 수호하는 이들이 조사당 벽에 그려진 이유는 그만큼 조사당의 주인인 의상대사를 높이 모셨기 때문일 것이다. 1985년에 벽화를 모사하여 조사당에 복원하였고, 1996년에 서까래와 기와 교체, 2005년에는 부식된 목재와 기와를 교체하였다. 이처럼 오래된 목조건물은 지속적으로 보수해야 한다. 보수하더라도 원래의 구조나 재료를 최대한 유지해야 하는데 최근에 부재를 많이 갈아 끼운 탓에 이전에 지녔던 단아한 멋이 많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안에 복원한 벽화가 잘 그린다고 하였으나 너무 현란한 채색이 650년 가까이 된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또 조사당 정면에 우측에 만들어진 창살집이 정면에서 조사당 전체를 보지 못하게 막는다. 이 창살집은 조사당 우측 창가 아래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에서 잎이 나온 것이라는 선비화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이다. 이 선비화라 불리는 식물은 골담초로 우리나라 중부 이남의 산지에서 높이 1.5m 정도 자라는 콩과의 낙엽 관목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이 선비화를 보고 지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문을 비겼는데
석장이 꽃부리로 화하였다고 스님이 일러주네.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가 있어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에도 이 선비화에 대한 글이 전한다.    

지팡이에서 자란 나무는 햇빛과 달빛을 받으나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는다. 늘 지붕 밑에 있어도 지붕을 뚫지 아니하고 겨우 한 길 남짓한 것이 천년을 지나도 하루와 같다.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鄭造)가 절에 와서 “선인이 짚던 것이니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서 톱으로 잘라갔다. 그러나 나무는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나와 전처럼 자랐다. 인조 계해년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는데 나무는 지금도 사시장철 푸르며 또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스님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 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 골담초가 전하는 대로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변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사당 처마 밑 식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이 아닌데도 적어도 퇴계 이황이 살았던 시기부터라고 해도 500년 가까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선비화 보호각 때문에 조사당 정면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지만 대신 의상대사의 전설과 연결된 자연의 신비로움은 맛볼 수 있다. 
 무량수전의 불상 아래부터 마당 중앙의 석등까지 돌로 만든 용이 묻혀 있다는 전설도 전한다. 용이 된 선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무량수전을 수리할 때 마당을 발굴해보니 땅에 묻힌 용이 허리가 끊어진 채 드러났다고 전한다. 사실인지 이후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하는 이유는 의상대사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증명한다.   
 부석사에는 국보만 다섯 점이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 무량수전(국보 18호), 조사당(국보 19호), 무량수전 소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45호), 조사당 벽화(국보 46호)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일곱 건의 보물이 있는데 부석사를 찾는 많은 이들이 놓치고 보지 못하는 보물 중 하나가 바로 자인당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1636호)과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보물 220호)이다. 아마 자인당이 무량수전 뒤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 조사당까지만 보고 내려가거나 무량수전 주위에 볼 것이 너무 많아 굳이 다른 것을 볼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조사당에서 서쪽으로 난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50m쯤 가면 응진전, 자인당, 단하각이 나온다. 그 중 자인당 안에 모두 세 구의 화강암으로 만든 불상이 모셔졌는데, 이 불상들은 원래 부석사 동쪽 방골마을 폐사지에 있었던 것으로 1958년 부석사로 옮겨왔다. 중앙은 석가모니불, 양쪽은 비로자나불이다. 특히 비로자나불상은 대좌는 물론 광배까지 갖춘 수준이 높은 당당한 불상으로 석굴암 불상의 조각 전통을 잇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석사에 가면 무량수전 뒤쪽의 조사당과 자인당으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예술의 미감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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