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들 성격유형만했지 정작 내 성격유형은 모른다는걸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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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들 성격유형만했지 정작 내 성격유형은 모른다는걸 깨달음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0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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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⑩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일즉 한 비구니(속명 안명 봉녀관者)가 있어 거금(踞今) 25년 전(前韓 강희원년 정미 12월 28일)에 해남 대흥사에서 체발(剃髮)하고 월명년(越明年) 무신(戊申) 5월 初5일에 본도에 들어와서…….

위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원문(原文)과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원문자체의 인쇄착오인지 옮기는 과정에서의 착오인지 불분명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내용도 문제를 안고 있다. 1907년 12월 28일에 삭발하고, 1908년 5월 5일에 제주도에 들어왔으며, 바로 이어서 “작은 절을 구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4월 8일에 설재경찬(設齋慶讚)할새”라고 한다. 삭발-입도(入島)-설재(設齋)의 월일(月日)에 모순이 있다. 원본과 재검토 후 재론해야 한다. 그리고 여타(餘他)와 사실전개가 전혀 다르다.  이은상『탐라기행』에는,
정미년(1907년) 9월에(혹은 12월 28일이라 하기도 함) 출가의 뜻을 품고 해남 대흥사 청봉(晴峯)화상에게 나아가 치발수계하고, 그 다음 해(1908) 정월(혹은 5월 5일이라고도 함)에 돌아와……

1907년 9월 제주를 떠나 1908년 1월 歸島했다고 한다. 그러나 귀도일은 생략되어 있다. 아울러 백환양씨「한라산 순례기(속)」의 출도(出島) 입도(入島)시기도 함께 기재한다. 당시에도 출도와 입도시기와 관련해서 두 가지 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종합하면, 봉려관은 1907년 9월 출가수계를 하고자 제주를 떠났고, 1908년 1월 5일에 출가수계를 마치고 제주로 되돌아온다. 이설(異說) 5월 5일은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 3개월여 간의 주요일정은 대흥사에서 삭발수계와 은사 유장(宥藏)이 거주하던 청신암에서 승려기본교육을 받은 것 등이다.

2) 항일의지 발아
봉려관의 항일과 관련해서는, 구술만 있고 확실한 문헌적 증거가 없어서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필자가 이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제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승려와 혈연관계가 있는 분(현 제주에 거주한 재가인)으로부터 봉려관이 친일을 해서 당시 항일운동 하던 스님들을 법정사로 내쳤다는 괴변을 듣고서부터다. 필자가 안광호와 법인 그리고 두옥문도들에게 들었던 사실과 괴리가 있었다. 1년 여간 구술을 채록하던 중, 봉려관이 항일의지를 갖게 된 중요한 구술도 채록하게 되었다. 법인은,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하신 것은 대흥사 때문이다.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을 본 것이다. 봉려관 스님은 군자금도 대흥사에 여러 번 가져다주었다. 항일투사다. 그래서 죽었다.

 박영희(朴暎熙, 1893-1990) 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구술자 M은,
1909년 7월 9일 밤, 항일운동이 대흥사에서 있었는데, 누가 밀고를 해서 모두 죽여서 함께 묻었다. 묻은 자리는 매표소 지나 대흥사방향으로 10여 미터 정도 가면 오른 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옆에 묻었다. 묻고 그 바위에 빨간 색으로 ‘아미타불’이라고 써서 기념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 지워져서 아미타불이라는 글자가 없다. 비석은 대흥사에서 매표소를 지나 직진하면 오른쪽에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 ‘호국의병충혼비’가 있다. 
의병과 스님해서 모두 60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일본군들이 미리 알고 포위해서 칼이 달린 총으로 쏴서 다 죽였다. 묻은 장소가 지금은 큰 하천이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큰 하천이 아니었고 작은 하천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큰 바위 옆 물이 없는 곳에 묻었던 것 같다.

위의 내용은 구술자의 구술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대흥사 심적암 항일운동 참사자 수(數)와는 차이가 있다.    
봉려관이 이 시기에 왜 대흥사를 갔는지? 이다. 참고로 안광호와 법인의 구술에 의하면 봉려관은 자주 육지를 오갔다. 관음사 주지 허운은 “아마 관음사 창건불사를 마치고 본사인 대흥사에 이를 알리려 가셨던 것 같다”고 한다. 필자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구술자 M과 법인의 구술을 참조하여 숙고하면, 봉려관이 당시 대흥사에 있던 항일의병들이 심적암이라는 동일 장소에서 같은 시간대에 일본경찰의 총칼에 피를 흘리고 죽어 있던 모습을 직접 본 것으로 사료된다. 이 때문인지 불분명하지만 향후 봉려관의 항일의지는 식량, 군자금, 거처마련 등 은밀한 활동을 통해서 실천된다.   
대흥사 산중에 피비린내 가득한 비참한 상황을 친히 목격한 것으로 보이는 봉려관은 이곳에서 자신의 항일의지를 다진 것으로 사료된다. 이후 항일의지실천 방식이 매우 신중했던 것은 당시 제주불교계가 처한 상황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대흥사 항일운동의 인명대참사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3) 승려 봉려관의 초기 활동(관음사 창건 前)
승려 봉려관은 은사 유장(宥藏)이 주석하셨던 대흥사 청신암(淸神庵)에서 승려기본교육을 마치고 다시 제주도로 되돌아온다.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을 정리하면, 승려 봉려관이 제일 처음 한 불사는 산천단 거처에서 1908년 4월에 불상을 봉안하고 齋를 시설(施設)한 이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 불사는 4월 8일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토착인 500여명이 몰려와 불상이 모셔진 집을 불태워버렸고, 봉려관은 불을 피해 집을 나와 걷다보니 백록담근처에 이르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7일간 기도 정진한다. 7일 관음기도를 마친 후 중생구제서원을 세우고 가파른 계곡에 몸을 던졌으나 떼 까마귀가 봉려관을 구명하였고, 봉려관은 산천단에 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노인의 말을 따라 산천단으로 내려간다. (5월 단오날) 여기에서 운대사로부터 가사를 받은 후, 1909년 봄 관음사를 창건한다. 여기까지가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에 기록된 1908년 4월부터 1909년 봄까지 약 1년 동안의 봉려관 행적이다.      

1918년 3월 2일『매일신보』3면의「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은, 
다시 고향으로 발을 돌이키어 자기 집으로 도량을 삼고 밤낮으로 염불삼매에 들어있더라. 동리의 완고가 이를 또 박대하여 불상을 깨뜨리고 동리 밖으로 쫓아내었더라. 동리 사람의 학대를 받아 갈 곳 없이 된 봉려암은 더욱 부처의 위대한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어 신앙이 굳게 되며, 그 길로 한라산중을 향하여 정처 없이 들어가더니 이윽고 능화봉(菱花峯)을 당도함에, 난데없는 꿀벌의 한 떼가 산 위에서부터 날아와서 봉려암의 전신을 둘러싸고 어느 곳으로 향함인지 앞길을 전도하였더라.……꿀벌에게 지도를 받아 얼마 쯤 가다가 백록담이라는 옛날 절터에 당도되었는데, 지금까지 몸을 둘러싸고 앞길을 인도하던 꿀벌은 일시에 흩어져 날아가 버렸더라.……필경 부처의 인도이라 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어 만 칠일 동안에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열성으로 기도를 았더라.……만 칠일 기도를 마치고 다시 산을 내려오더니 나려오는 길에 어찌 하다가 발을 잘못 디디어 수십 길이나 되는 절벽에 떨어졌더라.……난데없는 오작이 모여들어 앞뒤로 부축하고 평지에 내려다가 곱게 놓고 갔다.……

동리사람들의 핍박으로 다시 쫓겨나온 봉려관은 능화봉을 거쳐 백록담근처 옛날 절터에 당도한다. 여기에서는 7일 기도(不食不眠)를 마친 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절벽에 떨어졌으나 까마귀 떼가 봉려관을 구해 평지에 내려놓았다고 한다. 피로로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노인이 도사가 가사를 전달하러 왔으니 속히 나가 맞으라는 꿈을 꾸고 깜짝 놀라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산천단에 내려오니 계룡산에 산다는 노승이 가사를 봉려관에게 드렸고, 이 가사를 가지고 자중자애하시고 큰 사업을 성취하시라는 당부까지 한다. 그 후 봉려관은 열성으로 공부하고 전도(傳道)에 힘을 써서 신도도 많이 늘었고, 법돌암를 일으키고 다시 아미산에 관음사를 창건하였다. 여기까지가「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에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제주도 B스님은,
혜화(慧化堂 漢龍, 1896-1976)스님이 나한테 말씀하시기를, 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짓기 위해 한라산 백록담에서 100일 정진을 하셨는데, 산에 불이 확 타올라 봉려관 스님에게 불이 확 닥쳐서 깜짝 놀라면서 한 소식 하셨다고 들었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불은 온데간데없었다고 하셨다. 작심하고 불사를 성취하기 위해서 가셨다고 들었다. 봉려관 스님이 계를 받고 제주에 되돌아온 후, 백록담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위의 내용은 필자가 안광호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상사(相似)하다. 안광호는 “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꼭 창건하겠다고 결심하고 한라산 꼭대기 영실(?)에서 100일 관음기도를 하시다 기도삼매에 들었는지 갑자기 온 산에 불이 나서 불덩이가 봉려관 스님에게 들이 닥쳐서 깜짝 놀라 눈을 뜨면서 한 소식하셨다고 들었다. 사실 산에 불이 난 것은 아니었고, 경계였다고 하셨다. 이 기도 힘으로 관음사를 창건한 것이다”고 하셨다.  
종합하여 정리하면, 두 가지 행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귀도(歸島)한 후 산천단 거처로 갔는지? 아니면 화북으로 다시 갔는지? 이다. 필자는 화북 거처는 1900년 전후에서 이미 정리하고 나와 산천단으로 거처를 옮겼고, 출도(出島)하기 전까지 거주한 곳은 산천단 거처이다. 따라서 출도(出島) 전(前) 산천단 거처를 정리했다는 문헌이나 구술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본인이 거주했던 산천단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리고 안광호와 법인도 귀도(歸島) 후 산천단 거처에서 승려생활을 했다고 일관되게 구술한다.
정리하면, 봉려관은 귀도(歸島)한 후 → 산천단 본래 거처에 불상을 모시고 재(齋)를 시설(施設)하였다. → 밤낮으로 관음염불정진을 하였고 → 토착민이 불상모신 집을 방화해서 이를 피해 한라산 위로 올라갔고 → 능화봉을 거쳐 → 백록담의 옛날 절터에서 7일 기도정진 → 산천단에서 운대사로부터 가사를 받다 → 사찰 창건을 결심 → 사찰 창건을 위해 백록담에서 100일 관음기도정진 중 한 소식을 하시다 → 現 해월굴로 내려와서 관음사 창건지(創建地)를 결정한 후, 창건을 위한 관음기도정진과 본격적인 창건 준비를 병행하시다가 → 1909년 봄에 관음사를 창건한다. 이것이 필자가 유추하는 1908년 1월 5일부터 1909년 봄까지 승려 봉려관의 주요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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