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 최초 창건주 봉려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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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최초 창건주 봉려관 스님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2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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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⑫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망형석성도인행록」번역문에는,

1909년 봄에 향인 고경지가 여기저기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가 죽었다. 격문이 공과 연결된 것 때문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갑자기 광주로 이감되었다가 여러 달 뒤 대구로 이송되었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 때에 아버님께서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볕 더위를 무릅쓰고 산과 바다를 건너셨는데, 다행히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대구에서 돌아온 후 여승 봉려관과…… 

김석윤이 대구 공소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제주에 돌아온 시기는 1909년 7월 22일 이후이다. 그러나 한금순은 한라산 관음사 창건을 1908년으로 본다. 그런데 사실 관음사 창건은 1909년 봄이다. 만일「망형석성도인행록」에 의거한다 해도 관음사 창건은 1909년 7월 22일 이후여야 한다. 한금순이 김석윤을 관음사와 고의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해서 김석윤이 감옥가기 전 1908년을 관음사 창건연도로 채용한 것인지 그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금순이 김석윤의 관음사 창건에 깊숙이 관여한 근거로 제시한「망형석성도인행록」이 관음사 창건년도를 1909년 7월 22일 이후로 기록하고 있으니, 한금순 본인이 제시한 근거가 도리어 한금순의 발목을 잡은 격이 되었다. 그리고 왜「망형석성도인행록」에는 “김석윤이 1909년 2월 25일 제주의병항쟁에 참여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는 언급은 없고 ‘격문이 공과 연결된 것 때문에’라고만 언급한 것일까?「망형석성도인행록」은 해방 후 1949년 음력 10월에 쓴 것이니, 일제강점기도 아닌데 말이다. 관음사 창건에 김석윤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있다면 이후 중창되어 가는 과정에 희사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관음사 창건은 1909년 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안광호의 구술에 의하면, 최초 창건한 관음사는 제주 억새(어욱)으로 지붕을 얹은 집 1칸이다. 이 1칸의 어욱지붕 집이, 뒤이어 3채의 어욱지붕 집이 되었고, 그 후에는 여러 채의 어욱지붕 집이 된 것이다. 최초 창건한 1칸 어욱지붕 집 불사는 봉려관 한 사람의 주도 하에 창건이 되었고, 이어서 관음사 창건 후 계속되는 공사 즉 터 고르기, 길 내기, 우물 등 제반 토목공사에는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의 힘이 함께 했다고 본다. 그 뒤 여러 채의 초가집으로 증축이 되어 갈 때는 더 많은 민중의 보시가 있었을 것이다. 김석윤은 보시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깊숙이 관여했다면, 동생 김석익을 제외하고, 봉려관이 직접 언급했거나 또는 다른 문헌에서도 김석윤의 언급이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관음사 창건과 관련해서 김석윤이 관음사 창건에 관여도가 크다 또는 관음사 창건에 직접 같이했다는 언급을 안광호와 법인을 포함해서 제반 자료에서 아직 보지 못했다. 김석윤의 동생 김석익이 1949년 10월에 쓴『망형석성도인행록』을 제외하고 말이다. 실제 관음사 창건연도는 1909년 봄이다. 그러나 김석익의「망형석성도인행록」의 관음사 창건연도는 1909년 7월 22일 이후의 일이다. 1909년 봄에 창건된 관음사와 창건연도에 있어서도 상위(相違)하다. 그러므로 김석윤을 관음사 창건의 큰 공로자로 본 것은『망형석성도인행록』번역자의 의도적인 번역에서 기인했고, 한금순의 과도한 김석윤 공로선양으로 인해 오히려 김석윤이 관음사 창건과 직접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한금순이 드러내 보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필자는 김석익은 관음사가 창건된 후 계속 증창 되는 과정에서 김석윤의 불사참여를 말한 것으로 본다.  
또 김석익『심재집』‘戊申頃’에서는 번역하기를 “요망한 여자 봉려관이 불법을 가탁하여 절을 짓는다고 거짓 꾸며 여러 폐해를 낳았다(妖女 蓬廬觀 假託佛法 倡寺做誕 釀成).”고 한다. 이 번역은 현재의 시각으로 당시 상황을 의역한 것이며, 봉려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의역한 것으로 필자는 본다. 필자의 번역은 “요녀 봉려관이 불법을 빙자하여 사찰을 짓는다는 허망한 말을 만들어 하고 있다(妖女 蓬廬觀 假託佛法 倡寺做誕釀成)” 이다. 우리는 1908년 당시 제주사회 분위기를 참조해야만 한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직 생소할 뿐만 아니라, 다수의 도민(島民)이 봉려관이 행하던 불교의식을 혹세무민으로 생각하던 그 당시, 그리고 불법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된 민중들에게 절을 짓는 다며 시주를 받는 일을 평범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김석윤의 동생인 유생(儒生) 김석익이 ‘妖女’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게다가 주관적 시각이 지나치게 반영된 번역이 더해지면서, 김석익이 자신의 형 김석윤의 공은 치켜세우고 봉려관의 공은 평가 절하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 폄하까지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번역에 봉려관의 업적은 폄하하고 김석윤의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사료된다. 그리고『심재집』1908년의 내용은, 1908년에는 아직 사찰창건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중요한 방증이기도 하다. ……
엄밀히 말하자면, 위의 2種 인용문은 김석윤이 두 사찰 증창과 설립에 동참했다는 의미이다. 법정사도 김석윤이 설립을 주도했다는 말이 아니다. 보시 등으로 설립에 힘을 보탰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 창건주와 보시자의 구분을 올바로 할 줄 알아야 한다.  
 또 한금순은 “관음사 2대 주지 오이화의 김석윤을 위한『조사』에도 김석윤의 도움이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인용하기를,

봉려가 절을 지을 때 공적을 이룬 자가 누구겠습니까. 표창하여 새길 적에도 공의 이름은 역시 뚜렷하였습니다(蓬廬創寺功績者誰, 表彰之刻公諱亦著).

필자의 번역은,

봉려관이 사찰을 창건할 때, 공적을 세운 자 누구이겠습니까. 새겨서 세상에 드러내어 밝힐 때에는, 공의 이름 또한 기록될 것입니다(蓬廬創寺, 功績者誰. 表彰之刻, 公諱亦著).”

봉려관이 사찰을 창건했고, 김석윤은 이 창건불사에 동참한 공적을 세웠으니, 공적비를 세울 때 김석윤의 이름도 기록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때는 봉려관의 비문은 작성 완료되어 있었지만, 비석은 아직 刻하지 못했다. 또 오이화의 병환과 4‧3사건으로 인해 <관음사 봉려관> 비석은 설립되지 못했고, 오이화가 간직하고 있었던 <관음사 봉려관 비문>에는 김석윤이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 
또 한금순은 위의『조사』를 오이화가 작성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러나 필자가 채록한 구술 자료에 의하면 오이화는 1948년에도 1949년에도 병중에 있었고, 중앙 포교당에서 간병을 받아야만 할 그런 건강상태였으며,『조사』를 작성할 수 없는 건강상태였다. 오이화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법선스님의 일대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김석윤의『조사』는 오한일(吳漢日)이 쓴 것이 확실하다. <제주불교신문>제527호「제주불교 인물열전⑨-상운 김석윤 下」에 김석윤을 추모하는『조사』일부가 있는데, 마지막에 “佛紀二千九百七十六年 己丑 八…….” 칸을 바꾸어 “觀音寺代表 吳漢日”이라 하고, 또 칸을 바꾸어 “門生⎕⎕ 吳利化”라고 되어 있다. 오이화는 당시 글을 쓸 만한 건강상태도 아니었고, 구술할 만한 건강상태도 아니었다. 병으로 인해 중앙포교당으로 내려왔을 초기에는 천장에 끈을 달아놓고, 일어날 때면 천장의 끈을 잡고 힘들게 일어나셨다는 구술이 있다. 오한일이 조사를 쓰고, 오한일이 오이화의 이름을 첨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즉『조사』는 오이화와 관련이 없다. 그리고『조사』의 성격도 감안해서 번역에 임해야 한다. 또 오이화가 직접 쓴 문건 하나를 필자가 소지하고 있는데, 이것과『조사』의 필체(筆體)를 대조해 보았다. 그 결과『조사』의 필체와 오이화의 필체는 확연히 달랐다.  
논문 집필자가 자기주관에 맞는 것만 선택해서 쓰면, 사실관계는 반드시 틀어지기 마련이다. 객관적 시각을 갖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의 부모도 비판할 것은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학자가 가야 할 길 아닌가!  
종합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관음사창건은 1909년 봄에 이루어졌다. 1908년이 아니다. 그리고 관음사 최초 창건주는 봉려관 한 사람이다. 물론 관음사창건(토목, 길, 물, 불단, 의례에 필요한 용품 등)에는 많은 사람의 참여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도화주를 비롯해 이 많은 사람들을 모두 ‘창건주’라고 일컫지는 않는다. 그리고 관음사 창건과 김석윤은 한금순의 견해와 달리 전혀 관련이 없다. 관음사 창건과 김석윤은 무관하다.    
김석윤은 1909년 2월 25일 제주의병항쟁에 참여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1909년 3월 4일 광양에서 체포되었으며, 내란죄로 광주지방법원에서 1909년 4월 2일 10년의 유배형을 언도 받는다(그러나 제주의병항쟁에 같이 했던 고승천과 김만석은 1909년 3월 4일 총살당한다).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고, 부친의 노력으로 제주유림이 구명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09년 7월 22일 대구공소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는다. 그러므로 1909년 봄에 이루어진 관음사 최초 창건과 김석윤은 무관하다. 그래서 필자가 증창(增創) 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희사에 무게를 둔 것이다. 그리고『근대제주불교사 자료집』의『심재집』역문에서 ‘거짓으로 절을 짓는다고 해서 여러 폐해를 낳았다’고 기술한 것을 채용해도 1908년 이때에는 아직 관음사창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한금순이 인용한『망형석성도인행록(亡兄石惺道人行錄)』과 오한일의『조사』를 제외하고는, 기존하는 1900년 전반기 문헌 중 관음사 창건과 관련해 김석윤을 언급한 문헌을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신빙성 있는 문헌이 있다면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한금순은 관음사창건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비교검토한 후 결과를 내야 한다.      
 한금순은 “관음사 창건의 주역은 안봉려관이다. 또한 승려 김석윤이 관음사 창건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든가, “1908년에는 안봉려관을 도와 관음사를 창건하고……”, “김석윤은……관음사와 법정사 창건 등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 근대 제주불교의 핵심 인물이다” 등등, 안봉려관을 주역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김석윤을 과도하게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흔적이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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