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과 성불의 근본은 무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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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과 성불의 근본은 무념입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3.2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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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

성철 스님은 무념을 이야기하면서 진여무념은 제 8아뢰야 무기무념까지 끊어진 진여대용의 무념이며 구경각의 무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라는 것은 모든 진로망심이 없다는 말이며, ‘없다’는 의미 또한 일체 양변을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편집자주>

 

 

나의 이 법문은 무념으로 으뜸〔宗〕을 삼나니, 만약 유념이 없으면 무념 또한 세우지 못한다. 
『육조단경』

또 견성見性을 무념無念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는 육조 스님의 무념을 가지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의 이 법문은 무념으로 으뜸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견성과 성불의 근본은 무념입니다. 여기서 무념은 제8아뢰야 무기무념이 아니라 진여본성의 무념입니다. 제8아뢰야 무기무념無記無念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의 무념입니다. 실제로 진여대용이 현발하지도 않고, 해가 뜨지도 않은 것입니다. 광명이 없는 죽은 송장의 무념입니다. 그래서 진여무념은 제 8아뢰야 송장이 아니고, 진여대용의 무념이며 구경각의 무념입니다. 
만약 참으로 일체의 모든 번뇌망상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온갖 인연이 모조리 끊어지고 제8아뢰야 무기무념까지 완전히 끊어지면 무념도 서지 못합니다. 무념이 무념에 머물러 있으면 실제 무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념 또한 세우지 못한다’고 한 것은 어떤 병폐를 지적한 말인가? 앞에서 마조스님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십지보살이 견성을 하지 못한 것은 침공체적沈空滯寂해 있기 때문입니다. 침공체적은 그 내용이 무념과 비슷합니다. 대개 보면 설사 제6의식의 생멸념生滅念이 완전히 떨어졌다 해도 떨어진 거기에 제8아뢰야 무기무념無記無念이 있습니다. 이것마저 완전히 없어진 뒤라야 근본무념, 즉 진여무념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진여무념은 세울 수 있는가? 거기에 머물 수 있는가? 여기에는 부처도 머물 수 없고 조사도 머물 수 없으며, 진여라고 이름붙일 수 없고 마음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습니다. 참으로 무주심無住心입니다. 오직 증득해야만 알 수 있지 어떻게도 추측할 수 없습니다. 물을 마신 사람이라야 스스로 물맛을 알듯이 물을 마셔 보기 전에는 아무리 물맛을 얘기해도 물맛을 모르듯이 오직 스스로 증득해야 알지, 증득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무념으로 으뜸을 삼는다’고 하니까, 무념을 무슨 말뚝 세우듯 세워 그것으로 으뜸을 삼는 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무념도 세울 수 없다, 즉 무념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무無라는 것은 무엇이 없는 것이며 생각〔念〕이라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무라는 것은 상대의 두 가지 상〔二相〕이 없으며, 모든 진로塵勞의 망심이 없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니, 진여는 무념의 본체이고 생각은 진여의 작용이다. 『육조단경』

‘무’란 무엇인가? 두 가지 모양〔二相〕의 모든 진로망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 양변을 다 떠난 것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 양변, 즉 두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은 바로 중도입니다. 중도라고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두 가지 모양의 모든 진로망심을 완전히 떠났으니 중도입니다. 두 가지 모양의 모든 진로란 천차만별로 망심이 꽉 찼다는 말입니다. 육조스님은 대표적으로 서른여섯 가지 상대를 말했고 『육조단경』에서는 대표적으로 마흔 가지 상대를 말했습니다. 실제로 두 가지 모양을 거론하자면 모든 진로 가운데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무’는 일체 진로 가운데 있는 두 가지 상, 즉 양변을 완전히 떠났으니, 중도를 말합니다. 여기서 무無란 쌍차입니다. 
‘생각〔念〕’은 조照를 말합니다. 쌍차가 아무 것도 없으면 단멸이 되니, 염은 쌍조를 말합니다. 일체 진로 가운데 두 가지 모양을 완전히 떠나 중도를 정등각하면 그것이 곧 진여입니다. 진여는 생각의 체體입니다. 흔히 ‘무념無念’이라 하니까 ‘생각이 없다’고 새깁니다. 또 ‘무심無心’을 새길 때도 ‘마음이 없다’고 새깁니다. 그런데 생각이 없다고 하거나 마음이 없다고 하면 단견에 떨어집니다. 그러니 ‘무無인 심心’ 즉 ‘없는 마음’이라 하거나 ‘무無인 염念’ 즉 ‘없는 생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일체 진로의 두 가지 모양이 없는 염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 바로 새기는 것이지, ‘염이 없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자칫하면 단견에 떨어져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인 염’, 즉 없는 생각이라고 육조 스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진여眞如가 염念의 체體입니다. 
‘염’은 진여의 용입니다. 결국 무념이란 ‘무인 염’, 즉 없는 생각으로 양변이 다 떨어진 진여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실제 쌍차쌍조한 중도정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무념은 말하자면 두 가지 상相의 진로가 다 떨어진 진여의 염念, 즉 양변을 떠난 중도입니다. 쌍차쌍조한 중도의 정각을 무념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를 제외하고 따로 무념이 없습니다. 무념이 곧 중도고 중도가 곧 무념이며, 진여가 곧 무념이고 무념이 곧 진여입니다. ‘없다〔無〕’는 것은 일체 생멸의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이니 쌍차가 되고 ‘생각한다〔念〕’는 것은 항사묘용․진여대용이 현발하는 것이니 쌍조가 됩니다. 그러니 ‘무인 염’, 즉 ‘없는 생각’이라 하면 좀 별스럽게 새긴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석해야 올바릅니다. 

이 법을 깨친 자는 즉시 무념이니,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다. 
『육조단경』

육조 스님의 법을 깨친 자는 즉 무념입니다. 무엇을 생각할 수도 집착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가 다 떨어진 곳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종문宗門이 표방하는 것은 견성입니다. 견성성불을 표방하는데, 견성성불의 근본이 무념에 있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도 ‘무념無念으로 으뜸〔宗〕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념이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단멸斷滅의 무념을 말하는가? 아닙니다. 일체의 두 가지 상相이 다 떨어진 동시에 진여의 항사묘용이 일어나는 무념을 말합니다. 부처가 부처에게 조사가 조사에게 서로서로 전한, 바로 그런 무념법無念法입니다. 누구든지 이 무념법을 깨친 것이지, 무념법을 제외하고 불조佛祖의 법이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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