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강 같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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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강 같은 평화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4.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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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진 에세이 ‘길 위에서’ (15)

아마도 두어 계절이 넘어갔지 싶다.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K보살이 분홍빛 연꽃이 활짝 핀 먹물 주머니를 내게 맡겼다. 주머니가 탱글탱글해 보이는 것이 딱 보아도 1000염주다. 
 “이거 자기가 좀 맡아둬. 맡아두었다가 필요한 사람한테 줘.”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자비도량참법>등 불서 몇 권을 내게 맡겼다. 누구 필요한 사람 주라고. 
 “아니, 개종하세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아니야, 개종은 아니고, 108염주고 1000염주고 잘 안 돌려져서 그래. 욕심내서 사놓기는 했는데…”
 어딘지 맥이 빠진 K보살의 목소리에서 그간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살이 운을 떼었다.
 “L보살 알지? 그 보살이 개종했잖아. 천주교도 아니고 기독교로!”
L보살이라면 나도 잘 안다. K보살과 L보살은 둘도 없는 도반이었으니까. L보살은 성격이 부드럽고 따뜻해서 도반들에게 염주 선물이며 불서 선물이며 보시하기를 좋아하던 보살이다. 게다가 누구보다 신행생활을 활기차게 하던 젊고 밝은 보살이었다. 
 “아니, 어떻게? 정말?”
 L보살이 교회에 다닌다니 믿을 수 없지만 그녀가 며칠 전 세례를 받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신행생활을 하던 도반이 떨어져 나간 허전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K보살도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마음도 아프고, 알 수 없는 배신감마저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턱 하고 놓아지더란다.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마음 따뜻했던 도반의 새 출발을 축하해 주었단다. L보살이 기독교 세례를 받던 날 K보살은 보석이 촘촘이 박힌 십자가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다고 했다.
“L아 어디서든지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란다!”하고 마음을 내니 스스로 평화로워지고 따뜻해지더라고.
듣자하니 그동안 L보살은 불교라는 이름의 바다에서 무던히도 해매였던 모양이다. 넓고 푸른 바다는 악어도 있고 상어도 있고 그런 법이니까. 팔자니 업이니 이런 저런 것들을 닦아내려 애쓰고, 복도 지으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몸부림치던 한 불자가 평화로운 강으로 갔다.
 언젠가 또 넓고 광활한 생명의 바다가 그리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지금 강가에서 나름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부디 그대에게 강 같은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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