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려관 스님이 항일 운동했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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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이 항일 운동했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4.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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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⑭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봉려관의 항일운동과 관련해서 제주도 D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일제 강점기시대에 항일 운동하는 사람들을 법정사에 가서 돌봐주었고, 위험했을 때는 다 숨겨주고 양식도 다 대주었다고 들었다. 구속 된 후 형을 살고 나와서 법화사 창건 때 다들 조력을 했다고 들었다. 방동화 스님께서 이르시길, 봉려관에게 힘을 많이 빌었다고 말씀하셨다. 방동화 스님에게서 들은 바로는 여성이면서도 정의파라고 하셨다. 음성적으로 도왔지만, 친일처럼 보인 것은 회명스님 영향이라고 했다. 봉려관 스님이 무오 독립 운동할 때 뒤에서 많이 후원해 주었다고 들었다.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쌀, 돈을 대주고 때때로 사람도 보내주고 했다. 스승님들에게 어른들에게 봉려관에 대해 좋은 소리만 들었지, 나쁘다는 소리는 듣지를 못했다. 

K1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항일운동을 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군자금 조달 같은 것이다. 김석윤 스님은 월하리 분인데, 석윤 스님과 연관이 있어서 교분이 있어서 항일 운동하는데 보태주었다고 알고 있다. 자금이라든가 여러 가지 도와주셨다고 들었다. 봉려관 스님이 항일 운동했다는 소리는 자주 들었다. 방동화 스님과 봉려관 스님이 손잡고 항일운동을 했다고 들었다. 내가 어릴 때니까 위의 분들이 항일 운동하는 것을 확실하게 본 것은 없다.

J스님은,

진원일 스님이 봉려관 비를 만들 비문이 있었다. 8절지 3장 분량인데, 비문 내용은 크게 3가지이다. 대흥사에서 계 받는 이력, 관음사에서 돌아가시기까지의 내용, 항일운동 내용도 있었다. 봉려관 스님이 법정사에 계셨다는 내용이 기억에 있다. 이전에 봉려관 스님 비문이 없으니까 진원일 스님이 쭉 써 내려갔다.

필자가 봉려관의 항일 운동과 관련해서 제주도에서 채록한 것 중,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을 앞장서서 하지 않으셨다. 봉려관 스님이 뒤에서 군자금 같은 것을 댔다는 소리는 윗대 스님들에게 들었다.”이다. 해월당 봉려관의 입적과 항일운동이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본다. 특히 해월당 다비 후 제주도를 찾았던 안광호의 구술에 주목해야 한다.  

다음은 해월당의 입적지(入寂地)에 관해서다. 한금순은 ‘산천단 소림사’라 한다. 이것은 필자가 봉려관 생애정리에 임한 결정적 계기 중 하나다. 2017년 12월 16일 탐라성보문화원 주최로 열린 ‘한라산 영산재의 무형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라는 세미나에서「한라산산제단법당 소림사와 근대 제주불교」논문을 발표한 한금순은 “안봉려관은 이 산천단 소림사에서 입적하기도 하였고 오이화 주지는 제주 4‧3사건으로 관음사가 불타고 이 소림사에 머무르기도 하였다.”(p.51)고 한다. 지금까지 해월당 봉려관의 입적지로 관음사를 당연시 했었다. 그런데 돌연이 ‘산천단 소림사’를 근거문헌 제시도 없이 해월당의 입적지로 결정짓는 것에 경악한다. 
1983년 안광호는 필자에게 “관음사에서 돌아가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필자의 기억은 지금도 뚜렷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안광호는 해월당이 입적한 후 소식을 늦게 접해서 다비를 마친 후에야 제주도를 다녀가셨던 분이다. 또 제주도 연화사 종륜도 “인흥 스님께서 봉려관 노스님이 관음사에서 입적하셨다고 한 말을 분명히 들었습니다.”고 구술하셨다. 진원일도 “아라리 관음사에서 영원히 잠들었다”고 한다. 
…… 
종합하면, 해월당 봉려관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항일방식은 항일운동자금을 조달하고 항일운동인사의 의식주를 돌보고 이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이었다. 해월당이 이런 방식으로 항일운동 조력을 한 이유는, 당시 제주불교가 처한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봉려관이 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인명중시(人命重視)였다. 대흥사에서 항일의병들이 일본경찰 총칼에 한 순간에 죽어, 순식간에 피가 흥건해지고 피바다가 되어버린 광경을 친히 목격한 것으로 사료되는 봉려관은 제주에서 항일운동인사들의 생명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봉려관의 항일운동 조력이 일본인에게 감지가 된 것으로 사료되며, 결국 관음사에서 저녁에 (독이 든) 버섯국을 드시고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언론매체에 자주 드러났다는 것은 2가지 측면에서 예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제주지역사회에서 인지도가 높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독부의 감시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해월당은 이 2가지에 모두 해당된다. 평소와는 달리 모든 언론매체는 당시 제주사회에서 높은 인지도와 영향력을 지닌 해월당의 죽음에 대해 입을 닫아 버렸고, 해월당 생존 시와는 달리 그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당시 일간지 월간지 등에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해월당의 사망원인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다. 일제가 당시 제주불교계 더 나아가 제주사회에서 인지도와 영향력이 큰 봉려관의 죽음원인이 밝혀지면, 도민의 분노와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해 입을 닫았고 또 강제로 닫게 한 것이라 사료된다. 해월당의 죽음원인이 평범했더라면 이를 은폐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해월당은 많은 제주도민과 육지인들로부터 애도를 받았을 것이다. 
관음사에서 입적하고 관음사에서 화장을 마친 해월당의 유골은 제주 항아리에 담겨져 관음사 산중에 묻혔다가, 4‧3이 끝난 후에야, 산골(散骨)했던 인흥의 마음마저 후련하리만큼, 해월당이 창건한 한라산 관음사 대웅전 앞쪽 어딘가(사찰체험관 자리로 유추되기도 함)에 흩뿌려졌다.  
보덕사 법인이 “제 명에 못 돌아가셨다.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봉려관 스님 일대기 정리한다고 니 나한테 약속해라!”하신 그 아픈 마음, 이제는 후대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4) <관음사 봉려관 비문>원문

觀音寺 蓬蘆觀
凡土木之役, 創起若重新, 必待其時, 亦俟其人. 非其時莫能興, 非其人莫能當. 吁! 山水淸潔, 林壑幽靜, 仁智之所樂, 隱子之所棲, 亦莫如此地也.
是以金剛自性, 鐵石其志, 一入雲扃, 而菩提樹枝, 心華發明者, 非此人而誰也. 濟州之佛法, 廢止二百餘年于玆矣. 化主蓬蘆觀, 俗姓安氏, 本以土中人. 自中年, 幸作大檀越之化主, 身六時禮念, 勤而無疲. 入格于無礙感通之域. 得此悃愊於佛前, 信而尤發, 家積千金, 竟作陷身之芳餌, 心存一善, 終作上天之良橋. 勤參遊方之餘, 去辛丑春, 將涉飛揚島. 中流遇颶, 幾至覆沒. 未分芬黃之中, 却念觀音菩薩, 於焉不沾衣襪, 而落在浦屋. 則忽覺觀音之神力. 若此而行住坐臥, 未嘗忘于此懷矣. 
第念非獨念佛, 廣濟衆生, 於心是矣. 乃曰 如未遂吾志, 矢不梳頭矣. 丁未九月, 卽發出家之, 至到於海南大興寺. 其冬成道節, 依晴峯和尙, 薙髮受戒, 而還卽翌年正月五日也.
四月 奉安佛像而設齋. 土人五百餘, 齋力逐之, 曰此物因置, 則惑世誣民, 相應必多, 而幾至燒身之境, 僅避圖出, 則可謂天地無家客也. 所向無處而赴去,豈知身在鹿潭之邊耶. 絶食七日, 幾至力盡, 而誓不濟衆, 死於此矣. 卽墮於谷巖之下, 異哉! 數千群鴉, 銜衣救之. 又有一老, 警曰 爾去山川壇, 則自有好緣矣. 樸樕林中, 衣無餘縫而艱到, 有異僧雲大師. 曰望子久矣, 今日幸逢. 云而出給袈裟. 是何徵耶. 越明年己酉春, 創建寺宇於漢拏山.

(四‧三事件으로 因하여 더 以上彫刻치 못하고 苦心하든차 病患으로 吳利化스님은 涅槃하시다) 

역문(譯文) - 혜달
토목공사를 시작하거나, 처음부터 새로 건물을 세우려면, 반드시 적당한 때를 기다려야 하고, 그 일을 할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공사를 시작할 수가 없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아니면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아아! 산수가 청결하고, 산림이 깊숙하여 그윽하고 고요한 곳은,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가 즐겨하는 곳이요, 세상을 등지고 사는 자가 몸을 의탁하는 곳이나, 이 역시 이곳만 못하더라.  
      
금강 같은 자성, 철석같은 의지로 홀로 구름 빗장 열고 들어가, 보리수 가지 아래서 마음 꽃 피어낸 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인가?  
제주의 불법은 지금까지 이백 여년 폐지되었었다. 화주 봉려관은 속성은 안 씨요, 본래 제주도 사람이다. 중년부터 다행히 대단월인 화주가 되어, 밤낮으로 착실하게 예불과 염불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느슨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애감통(無礙感通)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부처님 전에 지성을 다하고 믿었으며, 더욱이 집에 천금을 쌓아 두어도 결국 몸을 지옥에 빠뜨리는 좋은 먹이가 될 것이요, 마음에 하나의 선을 쌓으면 마침내 천상에 오르는 좋은 다리가 될 것이라는 마음을 내었다. 그리하여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부지런히 여기저기 참방하던 중, 1901년 봄에 곧 비양도로 건너갔다. 비양도로 가던 도중에,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맹렬한 폭풍을 만나 배가 거의 전복되려 했다. 당황해 허둥지둥하던 상황에서 봉려관은 도리어 지성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어언 간에 옷과 버선이 젖지 않은 채, 비양도에 도착했으며, 그리고는 바닷가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이렇게 무사한 것임을 문득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하던 중에도 일찍이 이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다만 비단 염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하였다. 마침내 이르길 “만일 나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머리를 빗지 않을 것이다.”라고 혼자 되뇌었다. 1907년 9월에 곧 출가의지를 내고는 해남 대흥사로 갔다. 그해 겨울 성도절에 청봉화상을 의지해서 삭발 수계하고, 제주도에 되돌아 온 것은 1908년 1월 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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