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욕에서 멀어갈수록 참다운 법락은 한도 끝도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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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에서 멀어갈수록 참다운 법락은 한도 끝도 없는 것”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5.2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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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스님

 

석가모니 부처님은 납월 팔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 즉 금성이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것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그 순간의 감격스러운 정황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순간의 장엄한 광경을 묘사한 법문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선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화동지雨華動地라 하여, 헤아릴 수 없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땅이 육동으로 진동했습니다. 천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의 성불을 찬탄했습니다. 
어느 신도님께서 저에게 “불경을 보면 꽃비가 내린다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이 말이 참말입니까, 상징에 불과합니까?”하고 물어왔습니다. 이것은 불경에 있는 말씀이므로 조금도 흠축이 없는 사실입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할 때, 또는 무상대도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에 대해서 희귀한 일, 아주 귀한 일이 있을 때는 하늘에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또는 마하만주사화라는 꽃이 핍니다. 만주사화는 만다라화보다도 더 찬란하고 영원에 가까운 천상의 꽃이고, 마하만주사화는 만주사화보다도 더 완전무결한 천상의 꽃입니다. 
부처님이 무상대도를 이루었을 때, 이러한 천상 꽃이 마치 비가 오듯 피었습니다. 꽃비가 내렸습니다. 꽃비는 천상의 인간들이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부처님을 찬탄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을 우화동지라고 합니다. 천지 우주가 육동으로 진동하며, 즉 천지가 좌우전후, 상하 어디도 흠축 없이 진동하며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의 무상대도 성취를 찬탄했습니다. 
『법화경』에도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 즉 “하늘에는 천상의 만다라화 꽃이 항시 피어 있고, 하늘에 있는 북은 자연히 울리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소승경전에는 그런 말이 없으나 대승경전에는 부처님께서 무상대도를 성취하실 때나, 또는 여타의 대승법을 찬탄할 때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또는 천지 우주가 육동으로 진동해서 부처님법을 찬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실 때 부처님은 무상의 희락을 느끼셨습니다.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는 인간의 재미라는 것은 오욕을 떠나면 재미가 없지요. 하지만 사실은 오욕을 떠나면 떠날수록, 오욕에서 멀어가면 멀어갈수록 참다운 법락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법락을 미처 맛보지 못하므로, 인간의 재미는 욕계밖에는 없구나,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이성끼리 잘 사귀고, 물질이 풍족하고, 그런 것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떠나서는 참다운 행복은 없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의 참다운 법락은 더욱더 증장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살의 깨달음에서 맨 첫 단계는 환희지歡喜地아닙니까? 환희입니다. 환희라는 것은 자기 몸도 마음도 한없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보살이 깨달아서 환희지에 이를 때는 그 안락함과 행복이 어디에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마하가섭은 평생 동안 두타행, 즉 고행을 하고 누더기 하나와 바리때 하나로 평생을 지낸, 두타제일로 일컬어지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무상대도의 법을 전수받은 정법 조사입니다. 그런 근엄한 분도 보살 초지인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그냥 너울너울 춤을 추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좌선 중에 몸도 마음도 가볍게 되는, 이른바 경안지에 이르고, 또 경안이 좀 나아져서 희락지에 이르면 그때는 기쁨을 어디다 감추지를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법락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그것이 정말로 인간 세상의 오욕락과는 비교할 수 없구나 하고서 다시없는 희락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하면 염불삼매라든가 또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삼매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환희를 모릅니다. 물론 삼매라는 것은 주문을 외우나, 화두를 참구하나, 또는 염불을 하든 어떻게 하든, 삼매에 딱 들면 그 경계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로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산란심이 제거되고, 마음이 본래 마음자리에 들기만 하면, 그때는 어떻게 들어가든, 욕계가 멀어감에 따라서 무한한 환희를 느낍니다. 
무한의 환희를 느낀 것은 그냥 몸과 마음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적에 맛보시던 바로 그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마하만주사화라는 천상의 꽃이 비오듯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맛보면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마하가섭 같은 근엄한 대 도인도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온전히 맛보지는 못한다 해도, 조금은 맛을 봐야 인간 세상의 오욕락에 대해서 집착을 않습니다. 오욕락은 그냥 순간에 불과하고, 깨달음의 즐거움은 영원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희락 가운데서 위없는 경지, 환희 가운데서도 최상의 무상정변지를 성취하셨습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하시고 보니 자기 혼자만 성불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앉아 있는 보리수라든지, 보리수의 이파리 하나하나 보리수의 줄기 하나하나, 또 그 주변에 있는 숲, 천지 우주 모두가 다 부처님의 성불과 동시에 같이 성불해 버렸습니다. 사실 부처님이 성불했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산하대지 산천초목 일체중생이 동시에 성불했다는 그 의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산을 보고 땅도 보고 여러 가지 모습을 봅니다. 여러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자기 업장에 가려서 바로 보지 못합니다. 업장이 녹아지면 녹아진 만큼 그때는 차근차근 바른 모습에 가까워집니다. 이와 같이 업장이 녹아서 참다운 나, 진정한 나, 진정한 자기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우주의 참모습을 봅니다. 우주의 참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와는 굉장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아무런 생명도 없어 보이는 산이나 돌멩이 하나까지도 실상은 모두가 살아 있는 생명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약찬게」에 보면 산도 살아 있고, 냇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일체 동물 모두가 우리 인간과 차이 없이 생명을 갖추고 살아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산에는 산신이 있고, 물에는 용왕이 있고, 도량에는 도량신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겉모양이 이러니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모양 없는 마음이 있으니까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 몸에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아니지요. 그와 똑같이 산에도 역시 모양은 산이지만 그냥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의 혼魂이 있습니다. 산의 혼은 결국 산신인 것입니다. 나무 하나가 있으면 나무라는 모양뿐만 아니라 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신입니다. 하나의 돌멩이가 있으면 그때는 석신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만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오해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존재도 거기에는 다 혼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순수한 생명이 거기에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그것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본래면목을 볼 수 있는 바른 안목, 본질을 보는 안목에서는 모두가 다 생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 우주의 모든 존재는 무엇이나 순수생명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덕분에 우리 중생은 생사윤회라는 인생 고해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로 가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도인들이나 정통 조사님들 역시 부처님같이 온전히는 다 못 깨달았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무상대도의 맛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때는 전쟁도 하고 어떤 때는 온갖 무시무시한 고뇌를 겪지만, 여러 성자들의 가르침 덕분에 참다운 영생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고, 희망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은 경계는 그냥 좋다거나, 또는 마음이 개운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심수오묘한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의 경계를 구분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우선 마명 대사의 『기신론起信論』에 따라서 깨달음의 차서次序를 말하면, 네 가지 차원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무상대도라 한다 하더라도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깊고 얕은 관계를 잘 모르면 자칫 암중모색을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단지 첫 단계인 초범初梵에 도달해 놓고, “다 됐다”여길 수도 있는 것이고 중간쯤 가서, “다 되었구나”, “이것이 무상대도구나.”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맨 처음까지 가기도 어렵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대도이기 때문에 조금도 흠이 없는 일체 공덕을 갖춘 자리여야 합니다. 
우선 우리 욕계에서는 욕계 나름대로 먹는 것, 입는 것, 이성끼리 만나서 사는 것 등의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 갖추어져 있는 온갖 공덕이 없을 때는, 공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는 욕계를 버리고 무상대도로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 중생은 부처님 경계에 들어 있는 무한 공덕, 즉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무한 공덕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했다 하더라도 체험을 못 하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로나 아직 체험을 못 했다 하더라도 그 법신 부처인, 우리 자성自性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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