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려관 스님은 관음신앙과 양심적 민족관에 의지해서 근대제주불교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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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 스님은 관음신앙과 양심적 민족관에 의지해서 근대제주불교 일으켜 세운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5.2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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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 해월당 봉려관 스님 (17)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가 주최하고 탐라성보문화원이 주관한 해월당 봉려관 스님의 발자취 세미나에서 전 동국대 선학과 강사 혜달 스님이 주제 발표한“근대한국여성의 선구자-해월당 봉려관 스님”을 본지에서 다시 소개하게 되었다. (단, 지면의 제약으로 각주는 부득이하게 생략해서 실었다.) <편집자주>

 

7. 나오는 말

해월당 봉려관을 즉금의 시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해월당 봉려관이 살던 시기는 1800년 후반기에서 1900년 전반기이다. 봉려관 생존 시는 정치적으로는 혼돈의 상황이었고, 제주는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주변지역보다 훨씬 느린 발걸음을 내디뎠으며, 새문물이 점차 유입되던 중이어서 기존의 생존방식과 괴리가 있던 시기였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종교로서의 불교의 맥이 끊어지고 토속신앙이 성하던 시대였다. 더욱이 척박한 토질에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을 안고 민족적 아픔인 일제강점기에 처해 있었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던 지리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 하에서, 당시 제주도민에게 생소한 종교, 불교를 이해시키고 일으키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봉려관은 민중 속에 베어든 기존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결국 해월당은 관음신앙과 양심적 민족관에 의지해서 근대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운다. 
근대제주불교를 재건하던 과정에서 해월당에게 주어진 핍박은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으로 발현되게 하였다. 결국 비양도에서의 체험은 해월당에게 하화중생(下化衆生) 의지를 발아(發芽)하게 한 밑거름 역할을 하였고,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비장한 의지는 비양도에서 되돌아온 후 산천단에서 발아한다.
산천단은 해월당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이다. 해월당이 고향사람들로부터 쫓겨나왔을 때 그는 산천단을 새 거처로 삼았다. 해월당이 고통에 처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곳이 산천단이고, 이 결심이 해월당을 대흥사로 가게 한다. 비구니 유장(宥藏)을 은사로 출가수계한 후, 산천단에서 생면부지의 운대사로부터 가사를 전달 받았고, 운대사의 가사는 해월당이 근대제주불교의 맹아지(萌芽地)인 관음사 창건을 결심하게 했다. 이후 관음사 중창에 거액을 희사한 국채웅의 딸 국추보살과의 첫 만남도 산천단이었다.    
관음사는 근대제주불교의 맹아지일 뿐만 아니라, 근대제주불교가 활동영역을 넓혀갈 수 있도록 밑거름역할을 한 곳이기도 한다. 봉려관은 관음사에서 관음신앙을 제주 전역으로 펼쳐 나갔고, 관음신앙은 제주불교의 주요 수행방편이 되었다. 봉려관은 줄곧 관음신앙이었고 관음신앙하면 곧 관음사였으며 관음사가 곧 관음성지였던 것이다. 이런 관음사의 역할로 인해 중앙포교당에서 근대제주불교는 꽃망울을 피우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제주 전역에 포교당과 사찰이 설립되어 근대제주불교는 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 관음사를 언급하지 않고 근대제주불교를 논할 수 없는 것처럼, 해월당을 언급하지 않고 어찌 근대제주불교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근대제주불교 연구자는 해월당을 도외시했고, 해월당을 심도 있게 연구하지 않았다. 
봉려관은 대흥사 심적암 항일의병참사를 본 후 항일의지를 다졌고, 관음사에서 항일하는 방식을 결정한 후, 봉려관이 초기에 항일의지를 실천으로 옮긴 곳은 법정사이다. 봉려관의 항일운동은 제주 법정사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봉려관이 준비한 군자금은 육지 항일운동조직으로 전달된 것으로 유추한다. 봉려관의 항일자금조달은, 초기에는 탁발(일본인의 주시를 피할 수 있는 위험도가 낮은 방법)과 불사(佛事)를 가차(假借)해서 조달했고; 1920년대 제주와 오사카 간 직항항로가 생긴 후에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제주인들의 항일자금이 봉려관을 통해 육지 항일운동조직으로 전해졌다는 증언이 있다. 이처럼 봉려관은 군자금조달에 역점을 둔 항일인사였다. 봉려관이 관리한 항일운동자금 유입장소는, 초기에는 관음사였지만, 중앙포교당 설립이후에는 중앙포교당이 관음사를 대신했다고 본다. 중앙포교당은 1920년대 중반기 재일 제주도민이 봉려관에게 항일자금을 전달한 장소일 개연성이 크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왕래가 빈번한 장소여야 총독부의 눈을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중앙포교당은 항일자금을 전달받고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필자가 소지(所持)한 봉려관의 항일과 관련된 구술자료 정리가 50%도 안 된 즉금으로서는 더는 논지전개가 불가(不可)하다. 봉려관의 항일운동부분은 향후로 미룬다.   
제주근대사(濟州近代史)연구에서 봉려관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해월당은 제주연구자에게 차치(且置) 당했고, 해월당 봉려관의 생애에 등장하는 공청과 현몽이 해월당을 한 종교인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해월당 생전 시에는 공청과 현몽이 당시 사회통념에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즉금에는 정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제는 해월당을 사회적 시각에서 작게는 근대한국여성의 시각에서 살펴보고 평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해월당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번 논문은 향후 해월당 연구를 위한 해월당의 생애기초탐구이다. 그래서 해월당 봉려관의 생애와 관련해 비교적 논란대상이 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논지가 상식적이든 비상식적이든 이를 불문했다). 해월당의 활약을 엿볼 수 있는 중앙포교당과 제주 항일운동의 산실인 산천단, 관음사, 법정사 그리고 해월당의 항일군자금의 상세한 유입경로는 향후 연구과제로 미뤄둔다. 그리고 ‘해월당 한국여성의 미래를 꿈꾸다’로 해월당의 연구를 매듭짓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한금순은 필자가 앞에서 제기한 질의에, 추리가 아닌 두옥문도가 이해 가능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답을 제시해 주시길 고대한다.

(이번 논문은 준비기간 부족으로 인해 내용수정과 교정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사실과 상이(相異)한 내용이 있다면 많은 분의 지도편달을 바란다. 그리고 해월당 봉려관과 관련된 것을 알고 계신 분은 어떤 사실도 상관없으니, 필자에게 구술해 주시기를 꼭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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