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죽은 경계에서 참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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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죽은 경계에서 참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7.0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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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달마대사가 말하였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아니하여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 갈 수 있느니라.” 
한 생각도 나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져서 번뇌가 순식간에 쉬고서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 종일토록 어리석고 분별이 없으니 마치 진흙으로 만들거나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은 까닭에 장벽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집에 이르는 소식이 결정코 가서 멀지 아니하다. 

우리가 생각이나 분별로 과거니 미래니 하는데,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는 무심지에 들어갈 것 같으면 거기서도 과거․현재․미래 전체가 다 끊어져 버리는데 이것을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다’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로(塵勞), 즉 밖으로의 모든 반연이 순식간에 쉬게 되는데 이것이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는 것〔外息諸緣〕’이며, 또 혼침과 산란을 끊어 없애게 되는데 이것이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內心無喘〕’입니다. ‘애준준(獃惷惷)’이란 목석과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모양을 말하는데 무심한 경계를 표현한 말입니다. 일체 인연을 다 쉬고 일체 번뇌망상이 다 끊어진 무심지의 경계를 목석과 장벽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목석과 장벽과 같은 대무심지에 이를 것 같으면 이것이 도(道)냐 하면 도가 아니라 여기에 이를 것 같으면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 즉 도를 이루는 것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바가 없으니 곧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쉰 것’이요, 안에서 나는 바가 없으니 곧 ‘안으로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 것’이다 이미 내심무천(內心無喘)하고 외식제연(外息諸緣)한 즉 한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여러 큰 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흔히 ‘마음이 장벽과 같다’는 말에 대해서 오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장벽과 같다고 하니 어디 가다가 담이나 벽에 탁 부딪치는 것과 같이 가도 오도 못하게 앞에 무엇이 가로 막힌 것으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장벽과 같다’는 것은 흙으로 만든 사람과 같고, 나무로 조각한 사람과 같아서 목석과 다름없는 대무심지를 장벽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일념불생하고 전후제단한 무심지가 장벽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오매일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하면 몽중일여만 되어도 무상정이니만치 겉으로 볼 때는 일념불생 전후제단과 같은 경계이며, 거기서 실지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숙면일여의 자재위보살 이상이 되어도 일념불생전후제단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냐 하면 도는 아니어서 여기에 다시 살아나 깨쳐야 합니다. 자재위보살 이상의 멸진정에 오매일여를 성취하여도 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지 도를 성취한 것은 아니니 이 경계를 종문에서는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난다〔死中得活〕’고 합니다. 
일념불생전후제단이 되었다고 해도, 대무심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이 사람은 크게 죽은 사람입니다. 크게 죽은 사람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도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견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실지로 이만한 경계에 도달하려면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은 도가 아니고 견성이 아니라고 고불고조가 한결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물며 객진번뇌가 그대로 있는 경계에서 견성을 했다든지 도를 이루었다든지 하면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크게 죽은 경계에서 참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쉬고 쉬어 한 생각이 만년이며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면 승묘경계라고 부르니 보봉 광도자가 이런 사람이며, 세간의 진로가 그를 어둡게 하지 못한다. 비록 이러하나 도리어 승묘 경계에 떨어져서 도안을 가린다. 한 생각도 나지 아니하고 과거와 미래가 끊어진 승묘경계에 도달하여서는 반드시 곧바로 큰스님을 찾아보아야 함을 알아라. 

보봉광도자(寶峰廣道者)는 진정 문선사의 제자이며 총림에서 광무심(廣無心)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님으로서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기는 했지만 살아나지 못해서 실지 도안(道眼)은 없다고 평을 했습니다. 외식제연 내심무천은 쌍차를 말하는데, 철두철미한 쌍차가 되면 쌍조가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지만, 쌍차한데서 머물면 보봉광도자같이 무심에 머물러서 실지 쌍조가 절대로 안 됩니다. 결국은 도를 성취하려면 쌍차가 된 데서, 즉 크게 죽은 데서 다시 살아나 쌍조가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지고 살아나지 못하면 이것은 산 송장입니다. 
보통 번뇌망상․분별심이 그대로 있는 것을 가지고 공부가 아닌가, 도가 아닌가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 사람은 도가 아닌데 아직 죽지도 못한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법문은 오조 법연선사가     ‘사량분별이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 크게 죽은 사람도 도가 아닌 승묘경계’일 뿐이라고 한 진정 문선사(오조 법연선사의 스승)의 법문을 인용하여 한 말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끊어진 여기에서 크게 깨쳐야 실지로 바로 안 것이고 도를 이룬 사람인 만큼 누구든지 이런 바른 길로 가야지 도가 아닌 것을 도로 삼으면 자타가 다 망한다고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선문의 생명선입니다. 

원오스님의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오는구나’라고 법문하심을 보고 홀연히 과거와 미래가 끊어지니 마치 한 뭉치 헝클어진 실을 칼로 한번 끊으니 다 끊어지는 것과 같았다. 동상이 나지 아이하나 도리어 청정한 무심경계에 앉게 되었다. 원오스님이 말씀하시되 “아깝구나, 너는 죽었으나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스스로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원오스님이 방에 들어갈 때마다 다만 ‘유구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공안을 들어 물으시고 내가 겨우 입을 열려고 하면 즉시 ‘아니다’라고만 말씀하셨다. 내가 비유로써 설명하되 “이 도리는 흡사 개가 뜨거운 기름솥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자니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원오스님이 “너의 비유가 지극히 좋구나”고 하셨다. 어느 날 원오 스님이 ‘나무가 넘어지고 등칡이 마르니 서로 따라 온다’고 법문하심을 듣고 내가 즉시 이치를 알고는 ‘제가 이치를 알았습니다.’고 하였다. 원오 스님이 ‘다만 네가 공안을 뚫고 지나가지 못할까 두렵다’ 하시고는, 한 뭉치의 어려운 공안을 연거푸 들어 물었다. 내가 이리 물으면 저리 대답하고 저리 물으면 이리 대답하여 거침이 없으니 마치 태평무사한 때에 길을 만나면 문득 가듯 하여 다시 머물고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내가 스스로를 속이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을 알았다. 

대혜 스님이 자기가 알았다고 큰 소리친 이후 이십여 년만에 몽중일여가 되어서는 부처님은혜에 보답할 수 있다고 감격해 한 일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몽중일여가 되니 공부가 다된 것 아닌가 하고 원오 스님을 찾아 뵈니 ‘너의 지금 경계도 성취하기 어렵지마는 참으로 아깝구나! 죽어서는 살아나지 못하였으니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 다시 살아나야 너를 속일 수 없느니라’고 경책하셨습니다. 
전후제단의 승묘경계를 선문에서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였다’하여 지극히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히 깨쳐 활연히 크게 살아나야만 정안으로 인가하는 것입니다. 크게 죽은 후에 다시 크게 살아나기 전에는 불조 공안들의 심오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오 스님이 대혜스님에게 공안, 즉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몽중일여가 되고 숙면일여가 되었다 하여도 공안의 뜻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객진번뇌가 여전한데도 공안을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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