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산사에 있는 유물들 (4)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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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산사에 있는 유물들 (4) 법주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7.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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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90)
두훈(枓訓) 등 14명이 그린 법주사괘불 보물 1259호, 높이 높이 13.5m, 너비 5.8m

충청도에 있는 대표적인 산을 꼽으라 하면 가장 먼저 속리산을 떠올린다. 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불상을 싣고 산기슭에 다다르니 근처에서 밭을 갈던 소들이 스님을 알아보고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를 본 농부들이 소들도 알아보는 스님을 알아보지 못한 부끄러움에 그 길로 속세(俗)를 떠나(離) 산(山)으로 들어가 수행했다는 데서 속리산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말기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은 속리산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도불원인인원도(道不遠人人遠道)
산비속리속리산(山非離俗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세상을 멀리 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멀리 하는구나.’

 ‘도원인’과 ‘속리산’이란 글자로 대구를 이루는 절묘한 언어유희로 세태를 풍자하였다. 오랜만에 이 시구를 접하고는 운동을 겸한 숲길걷기를 할 때 수시로 걸려오는 손전화에 응답하고, 어쩌다 전화가 없으면 불안해하거나 잠시 쉬는 시간에 문자라도 확인하는 습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의자에 앉은 대신 계속 걷는다는 점에서 몸은 세속을 벗어났지만, 그 속에서 세속의 습관을 털어내지 못하면 그 숲길 걷기는 반쪽걷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단해지는 종아리 근육과 커지는 폐활량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숲길걷기는 그 목적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성찰하는 시간, 반성의 시간, 다짐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음에는 몸에 밴 습관을 깨기 위해서 걷는 시간만이라도 손전화의 전원을 끄겠다고 다짐했다.

이소룡의 사망유희(1978년) 구성 계획 초안


법주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쌍사자석등, 팔상전, 석연지 3점과 대웅보전, 마애여래의상, 법주사괘불탱화 등 보물 12점, 지방유형문화재 22점, 천연기념물 2점이 있고, 법주사는 사적,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명승으로 지정된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속리산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보니 주차장에서 절로 올라가는 길이 말 그대로 ‘속리(俗離)’, 속세에서 벗어나는 길인 양 순례자들을 즐겁게 만든다.
법주사의 수많은 보물들 중 먼저 국보 제5호로 지정된 쌍사자석등을 보자. 석등에서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받치는 돌은 팔각기둥과 북 모양을 한 경우가 많다. 법주사 쌍사자석등처럼 사자나 사람이 받치는 석등을 이형석등으로 분류하는데 그 수는 많지 않다. 특히 쌍사자석등은 대부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국보 제103호),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제5호, 720년경

등(보물 제353호),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이 그 예로 앞의 두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고달사지 석등은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등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 법주사 쌍사자석등으로 신라 1000년 중 최전성기인 72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수법도 가장 뛰어나 사자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팔각기둥 대신 두 마리의 사자가 화사석을 받치게 하는 형태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이후 이를 모방하는 석등들이 만들어졌고, 영암사지나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화엄사 사사자석탑처럼 네 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치는 새로운 모양의 탑도 만들어진다. 법주사 쌍사자석등의 두 마리의 사자는 두 발로 서서 서로 의지하며 온힘을 다해 자신들의 덩치에 비해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화사석을 받쳐 들고 있다. 잘록한 허리의 사자를 볼 때마다 마치 벌서고 있는 것 같아 귀여우면서도 안쓰럽다. 이에 비해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은 서지 않고 앉아서 등으로 받치는 모습인데 작은 얼굴에 비해 체구가 통통하여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 ‘이까지 것 정도야!’라며 능청을 떠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즐거워진다. 화사석 위를 덮는 상륜부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 용산 국립박물관 정원에 있다.
평소에 보기 어려운 법주사 보물 중 하나는 바로 법주사괘불이다. 야외 법회를 할 때 거는 그림이다 보니 1년에 한두 번 볼 수 있고, 그것도 시절 인연이 맞아야 한다. 높이 13.5m, 너비 5.8m의 큰 크기의 대형 불화이다. 보물 제1259호로 1766년 두훈(枓訓)을 중심으로 14명의 화사가 참여해서 그렸다. 꽃을 들고 있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어서 보살로 생각할 수 있으나, 수행에 의해 부처님이 된 보신불을 그린 것이다. 하체에 비해 상체가 더 강조하여 그린 이유는 부처님의 상호를 상세히 그리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걸었을 때 위쪽이 아래쪽보다 눈에서

고달사지 쌍사자석등

더 멀기 때문에 조금 더 크게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얼굴과 몸의 비례가 조화롭고 보관과 의복의 채색, 주위의 꽃들이 화려하여 전체적인 분위기가 화사하다. 부처님의 손가락 표현에서는 대개 손톱을 길게 표현하지 않고, 보살인 경우에 가늘고 길게 표현하는데, 이 그림은 보살형으로 그려진 보신불이기 때문에 보살처럼 손가락도 가늘고 손톱도 길고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초파일이나 수륙제 같은 야외 법회가 있을 때 13미터의 큰 그림이 걸린 장관을 경험해 보자.   
멀리서 법주사를 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금동미륵대불과 팔상전이다. 그 외의 절집들과 유물이 여기저기 오밀조밀하게 자리하였다. 산지가 아닌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금강문을 들어서면 탁  트인듯한 느낌을 받는다. 과거 무술 영화의 대표적인 배우인 이소룡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사망유희(1978년)’를 법주사에서 찍을 계획을 세웠었다. 안타깝게도 영화를 찍는 도중 이소룡이 갑자기 사망해 법주사가 세계에 알려질 기회를 놓쳤다. 아마 이소룡의 관심을 끈 것은 5층 형태의 팔상전과 커다란 불상이었을 것이다.      
40여년 전 이소룡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법주사에 가면  눈이 즐겁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법주사가 속리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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