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으로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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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선이 아닙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07.3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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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쓸 것이 없으면 성불한다.”『경덕전등록권』권28, 「남양혜충국사어」

‘마음을 쓸 것이 없다’는 것은 일체가 전부 무심無心이라는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주처主處가 없고 집착이 있으면 무엇에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집착과 주처를 완전히 떠나면 순수한 무심이 됩니다. 그것을 성불이라 합니다. 

무심으로 스스로 이루니 부처님도 무심이다. 『경덕전등록권』권28, 「남양혜충국사어」

‘무심으로 스스로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룰 성成 자를 성품 성性자로 써놓은 것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성품 성자로 하면 안 됩니다. 무심으로 스스로 이루었다, 즉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또한 무심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무심으로 불법을 근본적으로 다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이것이 부처입니다. 무심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무심입니다. 

무심이 부처이다. 『조주록』

‘무심이 부처’라고 했는데, 앞의 두 가지 인용은 혜충 국사가 말한 것이고, 뒤의 것은 조주 스님이 말씀한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여러 번 인용한 것 같지만 한두 가지만 인용하면 혹 의심이 생길 수도 있어서 여러 조사들의 말씀을 인용하여 권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내용이지만 여러 분의 말씀을 여기에 인용한 것입니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며 무심이 도이니,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에 움직임이 없어 유.무와 장.단과 피.아와 능.소 등의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본래 부처이고, 부처가 본래 마음이다. 
『완능록』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며 무심이 도’라고 했는데, 도와 부처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도이고, 도가 곧 부처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무심이 도이고 부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견성은 무심을 견성이라 하지 다른 것을 견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이 움직인다’는 것은 제 8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통틀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이 움직이는 것이 없어서 유‧무와 장‧단과 피‧아와 능‧소 등등의 마음이 없다면 마음 그대로가 본래 부처이고, 부처 그대로가 마음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거나 생각이 움직임이 없으면 유무심도 없고, 장단심도 없고, 피아심도 없고, 능소심도 다 없습니다. 이것은 전부 양변을 거론한 말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떠나면 순전히 무심이 됩니다. 이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부처라 하며, 이것을 견성이라 합니다. 

다만 바로 여기에서 무심하면 본체가 스스로 나타나니, 마치 큰 해가 허공에 떠올라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다시 장애가 없는 것과 같다. 『전심법요』

다만 바로 여기에서 무심하면 본체가 스스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해가 허공에 뜬 것과 마찬가지로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다시는 장애가 없습니다. 

무심이란 일체의 마음자리가 없는 것이다. 여여한 체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힘이 없고 장애가 없으며, 능소도 없고 방소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득실도 없다. 『전심법요』

무심이란 일체의 마음자리가 없는 것을 말하며, 일체의 심소가 다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완전히 무심이 되면 여여해서 변동이 없습니다. 그런 여여한 체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동요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장애가 없습니다. 막히는 데도 없으며, 능소도 없고 방소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득실도 없습니다. 
무심이란 안으로는 아주 여여해서 목석처럼 추호도 동요가 없고, 밖으로는 허공처럼 무변해서 한량없이 넓습니다. 그래서 장애가 없습니다. 능소가 있다든지 방소가 있다든지 모양과 득실이 있는 것은 유심이지 무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제 우리가 견성성불해서 실다운 무심을 성취하면 이처럼 내외가 완전히 구비됩니다. 
어떤 사람은 법문을 듣고 한 생각 동안에 무심을 얻으며, 어떤 사람은 십신.십지에 이르러서야 무심을 얻는다. 한 생각 동안에 얻은 사람이 십지를 거쳐서 얻는 사람과 공용이 같아서 다시 깊고 얕음이 없고, 다만 여러 겁을 지나며 공연히 고생만 컸을 뿐이다. 『전심법요』

법문을 듣고 잠깐 사이에 문득 무심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잠깐 사이에 생사를 벗어나고, 한 번 뛰어넘어 여래지에 곧바로 들어가 완전한 무심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십신으로부터 삼현을 거치고 또 십지를 거쳐 등각을 거쳐서 무심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무심을 얻은 사람과 삼현과 십신을 거쳐서 무심을 얻은 사람의 공용이 다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시일이 많이 걸렸든 단박에 얻었든간에 무심을 완전히 성취하면 공용은 똑같습니다. 시일이 오래 걸렸다고 해서 그 무심이 더 귀하고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단시일에 성취했다고 해서 그 무심이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거기엔 경중과 심천이 없습니다. 경중과 심천이 없어서 한 찰나에 무심을 성취한 사람이나 삼아승지겁에 삼현과 십지를 거쳐 무심을 성취한 사람이나 그 공용은 똑같다는 말입니다. 
만약 삼현과 십지를 거쳐 삼아승지겁의 오랜 세월을 거쳤다면 공연히 쓸데없는 헛고생만 했을 뿐입니다. 많은 시일을 노력해서 얻은 무심이 단시일에 얻은 무심보다도 공용이 여러 가지 더 많을 것 같으면 고생이 되더라도 빙빙 둘러갈 수도 있겠지만, 단시일에 얻은 것이나 장시간에 걸쳐 얻은 것이나 결국 무심을 성취한 것은 똑같으니 바로 가는 길을 두고 둘러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망념이 생기지 않는 것이 선이고,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이니, 본성이란 무생심이다.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정을 얻은 사람은 비록 범부일지라도 곧바로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돈오입도요문론』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나지 않은 것이 선입니다. 여기서 ‘망념’이란 제8아뢰야 근본무명까지 통틀어 말합니다. 제8아뢰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어져서 일체 망념이 나지 않는 것을 선이라 합니다. 그냥 참선한다고 앉아 있는데 혼침 아니면 산란이고 산란 아니면 혼침인 것은 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이란 근본적으로 자성을 깨치기 전에는 선이 아닙니다. 참다운 선, 즉 실다운 선은 제8아뢰야 근본무명까지 다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본성을 보지 않을 수 없고,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지 않을 수 없고, 진여본성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성이란 일체 모든 망념이 나지 않는 무생심을 말합니다.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을 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은 선정을 말합니다. 정에 들면 일체 경계를 대할 때 언제든지 무심하여 능소가 없습니다. 능소가 없어서 어떤 경계에서든 분별심을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전체가 다 그대로 무심입니다. 그래서 팔풍이 불어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팔풍이란 이로움과 손실, 헐뜯음과 높이 기림, 칭찬함과 기롱, 괴로움과 즐거움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들 상식으로 아는 것이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일체 경계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팔풍이 아무리 불어도 변동이 없는 참다운 정을 얻으면 그런 사람은 비록 범부지만 곧 부처의 지위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구경각입니다. 
부처의 지위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모양이 아무리 범부 같아도 속으로 진여본성을 깨쳐 일체 경계에 완전히 무심하여 동요하지 않으면 이것이 부처이고 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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