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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 불두화의 사랑 (글:선덕화)근대 제주불교 중흥조 봉려관 스님 탄신 154주년 기념 - 제5회 신행수기 공모 당선작

올해 제5회 신행수기 공모에 모두 수상작 7편이 선정됐다. 이번 호에는 선덕화 불자가 쓴 “불두화의 사랑”을 실었다.  <편집자주>

 

부처님.
절 앞뜰에는 불두화가 한창입니다. 살아서 님 한 번 못 만나고 가는 꽃잎은 밥그릇처럼 수북하게 헛꽃만 달아 헛배만 부릅니다. 비록 아무 것도 열매 맺지 못한 生이었지만, 그래도 내년 봄이면 또 다시 오리라고 불두화는 부처님 전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벌과 나비를 부를 향기도 없고 가을이면 열매 맺을 씨앗도 없으니, 다시 피려면 꼭 인간의 손을 빌어야 하는 이 모순을 불두화는 제 몫의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휘묻이든 접목이든 사람의 손을 빌어 봄이면 어김없이 불두화는 다시 핍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보고 싶은 그 얼굴도 이렇게 어김없이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부처님의 半開하신 눈은 인간사 모든 슬픔에도 반만 슬프고, 모든 기쁨에도 반만 기뻐하라고 깨우쳐 주시는 듯합니다. 
저는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다복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재혼하기 전, 두고 온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눈이 소처럼 커서 젖을 힘차게 다 먹고 나면, 두 눈이 발갛게 충혈이 되기도 했습니다. 폴짝폴짝 뛸 때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명주실 같았습니다. 구구단 2단을 외워서 오물거리는 입술이 어여뻤습니다.
그러나 저와 전 남편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습니다. 친정아버님께서는 시댁의 가문이 좋다고 맞선 한 번으로 결혼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집안의 골칫 덩어리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지만, 고등학교 중퇴가 그의 최종학력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느 날은 저의 결혼 패물을 달라며, 그 다음날에 주겠다고 가져갔지만 그 패물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만나고 있던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대리점은 문을 여는 시간보다 닫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 때 이혼을 하지 않고 참고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참고 견뎌야 할 시간은 아득했지만, 두고 온 아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내가 더 참아야 했었나를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습니다. 이혼을 하고도 전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나와 다시 재결합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포클레인 장난감 하나를 사주고 저는 혼자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유리창 너머에서 아이는“엄마 가지 마. 엄마 가지 마.”라고 소리치며 울었습니다. 그것이 아들을 본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기억 속에서 아들은 언제까지고 나이 먹지 않은 네 살배기 아이로 남아 있습니다. 보고 싶은 아들은 꿈에서라도 한 번 나타나 주지 않았습니다.
사촌 형부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사별을 하고 아이가 셋이 있었습니다. 친정 식구들은 모두 말렸지만, 저는 남편과 재혼을 했습니다. 사람이 순하고 점잖아서 바람 같은 건 피우지도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불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백팔 배를 하고 염불을 켰습니다. 집 안에 낭랑히 퍼지는 천수경과 반야심경이 아침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남편을 따라 절에 다니며 저는 두고 온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이들에게 잘하면, 지금 제 아들을 키우고 있는 사람도 아이에게 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새엄마가 아이를 죽자고 미워해서 결국 할아버지 댁에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부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니 새엄마에게서 계속 학대를 당하는 것보다는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시간이 지나야 그 뜻을 알게 되는 것이 어리석은 중생의 요량입니다. 
저 역시 남의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도 중생인지라 아이들이 때로는 밉고 때로는 고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헤어진 아들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더 잘하려 노력했습니다. 인드라 망처럼 연결 된 천상의 그물들을 타고 저의 마음이 아들에게까지 가서 닿기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막내가 태어나고 우리 집은 차차 안정을 찾아 갔습니다. 두고 온 아이에 대한 그리움도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절에 다니는 것도 차츰 발길이 뜸해지고 저는 어느 새 막내와 아이들을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도 제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던 저의 모습에 저도 놀랐습니다.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예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집에는 어느 새 냉기가 돌았고 남편은 남편대로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혼자 절에 갔습니다. 제 마음이 탁해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고 몇 배를 하는지 세지도 않고 절을 했습니다. 숫자를 세다보면 오직 그 숫자를 채우기 위해 절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몇 배를 하든지 제 마음의 나쁜 생각을 없애달라고 부처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머리카락이 다 젖고, 방석이 앞으로 밀려가 어느 새 부처님 전까지 바짝 다가갔을 무렵, 문득 일타스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일가친척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토록 명징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 잡고 처음 마음으로 되돌아 가기위해 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여섯 개씩 쌌습니다. 교복 자율화 때문에 아이들에게 비싼 운동화도 사 신겨야 했습니다. 경찰의 월급으로는 빠듯했지만 아이들 기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초등학교를 다니는 막내의 옷은 제가 만들어 입히기를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입던 옷을 자르고 박음질을 해서 바지도 만들고 티도 만들었습니다. 커피 값이 아까워서 친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부처님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의 사진을 구해 책상위에 올려놓고 절을 했습니다. 언젠가 가 본 석굴암에는 측면에서 본존불을 호위하는 나한과 보살님들이 있었습니다. 옷고름이 바람에 날리는 듯 조각된 나한의 모습을 보고, 천 년 전의 바람이 아직도 석굴암 속에 불고 있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본존불의 미소는 그지없이 자애로운데, 저 먼 서역에서 비단길을 타고 불어 온 모래바람을 맞으면서도, 본존불은 눈 한 번 찡그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바사계의 바람을 맞으며 저도 본존불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의연하고 싶었습니다. 새벽마다 이산선사 발원문을 외우며 저도 그만한 서원을 세우기 위해 저를 비우는 연습부터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저는 올바른 서원 하나 세우지 못하고, 저의 마음을 비우는 것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이 셋은 잘 자라서 모두 교사가 되었습니다. 막내는 4급 서기관으로 국방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맙게도 아이들은 모두 불자입니다.
기도를 할 때 소원과 욕심을 구분하는 것, 나를 위한 기도는 맨 마지막에 하는 것, 그리고 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루어지면 이루어진 대로 좋은 것이고, 안 이루어지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더 좋으니까 안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불만이 많습니다.
“엄마, 그러니까 불교가 밍밍하다는 거잖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게 뭐야?”
“더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좋은 일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고 나쁜 일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보면 불교는 易으로 얼마나 치열한 현실속의 종교인지를 알게 된단다.”
“엄마, 그 동생을 한 번 찾아보자. 한 번이라도 어떤 모습인지 보아야 엄마도 그 동생도 가슴속에 여한으로는 남지 않을 거 아니야.”

아이들의 응원 속에 어렵게 얻어낸 아들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들은 끝내 저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의 엄마라고 수백 번을 문자를 보냈지만, 아들은 끝내 답이 없었습니다. 부처님, 거기 그렇게 앉아 계시지만 말고 우리 아이의 마음을 반만 돌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들 설총이 불렀을 때, 살짝 뒤를 돌아보았던 원효대사를 닮은 아미타불처럼, 저도 저의 아이를 살짝 멀리서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끝내 전화번호를 바꾸었고 저는 연락할 방법도 잃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용서할 수 없었으면, 얼마나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었으면, 끝내 저의 전화를 거부했을까요? 아들은 직업군인으로 있다가 전역을 하고 친구와 함께 오락실을 한다고 아들의 친척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늦은 밤에, 큰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와 백만 원만 해달라고 했지만 큰 어머니는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해주겠다고 했지만 아들은 거절했다고 답을 거쳐 들었습니다. 부처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화번호를 바꾸지 않는 것뿐입니다.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만이 아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부처님, 
불두화는 튀밥 같은 꽃송이를 달고 부처님의 침묵뿐인 법문을 하루 종일 듣고 있습니다. 배롱나무도 산돌배나무도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절 마당가에서 귀를 쫑긋 세우며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가슴 속에 품었던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이제는 놓습니다. 이 生에서 다시 못 만나면 어떻습니까? 아들이 바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저는 저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수한 꽃잎을 달고도 열매하나 맺지 못하는 불두화의 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쩌면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람들의 눈 호사만 시켜주고 가는 생이라고 해도 불두화는 충분히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살아서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아들은 누군가의 아버지로, 누군가의 지아비로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부처님, 저는 이미 충분합니다. 
이 사바세계에는 더 이상의 슬픔도 더 이상의 기쁨도 필요치 않는‘있는 그대로가 최선’입니다. 연화장세계에는 더 이상의 덧셈도 더 이상의 뺄셈도 필요치 않은 ‘지금 이대로’가 부처님의 극락정토입니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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