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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보드가야 대탑에서 빠알리 삼장 완역 발원” ”제주불교신문 창간 30주년기념 각묵 스님 특별 인터뷰

제주불교신문이 창간 30주년을 맞아 보드가야 대탑 앞에서 세운 서원을 이루기 위해 하루 10시간이상씩 역경불사에 몰두하고 계시는 각묵 스님을 모시고 한국불교의 미래와 제주불자들의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해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스님께서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신 지 10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이루어내신 번역 성과도 말씀해주십시오.

제주불교 창간 30주년 기념이라는 뜻 깊은 지면을 통해서 저를 대담자의 한 사람으로 택해주셔서 먼저 감사드립니다. 
저는 1989년 3월에 인도 뿌나로 유학을 나가서 1998년 6월에 인도를 떠나 미얀마 등지에서 상좌부 불교의 교학과 수행을 더 체험하다가 2002년 8월에 한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하여 2002년에 대림 스님을 원장 스님으로 모시고 초기불전연구원을 설립하였고 그 후 지난 17여 년간 나름대로 빠알리 삼장 번역 불사와 전법을 위해서 노력해왔습니다. 대림 스님과 빠알리 삼장 번역 불사에 매진하여 2012년에 4부 니까야를 19권으로 완역하였습니다.(디가 니까야와 상윳따 니까야는 제가 번역하고 맛지마 니까야와 앙굿따라 니까야는 대림스님이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2016년에는 논장의 첫 번째인 담마상가니를 두 권으로 번역해 내고 작년 2018년 11월에는 논장의 두 번째인 위방가도 두 권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2002년에 아비담마 길라잡이(대림스님과 공역)를 번역하여 2017년에 전정판까지 내어서 지금까지 모두 15쇄를 찍었고 단행본으로 대념처경, 대반열반경도 출간하였고 초기불교 교학과 수행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초기불교 이해와 초기불교 입문도 출판하여 좋은 평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는 쿳다까 니까야(小部)에 속하는 우다나(自說經)와 이띠웃따까(如是語經) 번역과 윤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년 3월에는 각각 한 권으로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학을 떠나실 때가 언제였나요? 그 때 스님의 마음과 10년간 유학생활에서의 마음 그리고 귀국하셔서 역경불사를 수행해 가시면서 마음의 변화랄까 그런 것을 간략하게나마 듣고 싶은데요. 

저는 대학시절에 부산에서 대학생불교학생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늘 대불련 교화부장 출신이라고 자랑하고 고마워하면서 불교도시인 부산에서 불교를 접하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선방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화두에 나름대로 의정이 돈발하여 출가하여 선방에서 화두참구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렇게 잘 들리던 화두가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고뇌하면서 불교란 무엇인가? 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아는가? 라는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대불련 활동하면서 탐독했던 법정 스님께서 번역하신 숫따니빠따와 이원섭 거사님이 옮기신 아함경이야기와 불교개론 등을 다시 보게 되었고 특히 월포라 라훌라 스님의 What the Buddha Taught를 진지하게 읽으면서 불교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고 정확하게 알려는 태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도반 함현 스님과 스승이신 활성 스님과 저를 출가의 길로 이끌어주신 철오 스님의 권유와 크신 배려 덕분으로 89년 3월에 인도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날 때도 그랬고 특히 인도에 가서 부처님의 성도지인 보드가야 대탑에 엎드려 금생에 빠알리 삼장을 완역하고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발원하였습니다. 그 발원의 힘으로 지금도 부지런히 역경 불사에 임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년 11월에 위방가를 두 권으로 번역 출간한 뒤에 그 동안 번역하는 틈틈이 5년 이상이 걸려서 3400개의 표제어를 뽑고 경들과 주석서들의 출처를 밝히면서 만들려고 준비오던 가칭 <빠알리 용어 사전> 작업에 몇 달 동안 집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빠알리 삼장 번역 작업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중단하고 우다나와 이띠웃따까 번역 작업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빠알리 삼장 번역 작업에 매진하겠다는 것이 요즘은 더 확고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빠알리 삼장 완역불사에 대한 저의 마음의 변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가급적이면 다른 일은 줄이고 빠알리 삼장 역경불사에만 더욱 매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강의를 다니고 법회를 다니는 일도 줄이고 이곳 제주에 머물면서 역경 작업에만 몰두하고 싶습니다.

▶불자들이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고 있다고 보는데, 스님 역시 그와 같은 반응을 체감하시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한국불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스님들이 불교공부를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과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음식이나 사회문제나 사찰관리에는 큰 관심을 보이시는 스님들이 정작 우리의 스승이신 부처님 가르침에는 관심도 없고 문외한인 분들이 많아 보여서 저는 큰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나 대승불교의 가르침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는 대승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외치면서도 정작 대승이 무엇인지를 두고 바르게 사유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잘못 보았기를 바랍니다. 게다가 힌두교의 자아나 대아 사상을 불교로 오해하여 이를 전파하고 다니는 분들도 많아 보입니다. 
역사를 아는 이 시대에 무엇이 부처님 가르침 즉 불교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실존하셨고 불교의 창시자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스님들과 뜻있는 재가 불자님들 사이에서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하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원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빠알리 삼장은 지금 한국에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한글로 번역이 되고 있고 이를 토대로 활발한 교학공부와 토론과 대화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대승의 가르침은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정토, 밀교에다 선불교까지 넣어서 워낙 방대하고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도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다 포함시키다보니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섭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승불교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스님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승불교를 깊이 신행하시는 제가 존경하는 한 스님께서는 한국불교에는 이제 초기불교밖에 남지 않았다고 자조적인 말씀까지 하십니다. 저는 초기불교를 제 자신의 신념체계로 삼고 살아갑니다. 저는 이제 불교의 종손이요 맏형인 초기불교가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만 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현재 초기불교에 관심 있는 불자들이 공부모임이 전국에 걸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공부모임들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전국적으로 초기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바탕을 둔 승원과 단체는 너무 많아서 여기서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적을 두고 있는 초기불전연구원을 보기로 들겠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초기불교 공부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근본도량인 김해 장유의 보리원에서는 매달 첫째 일요일의 공부모임과 셋째 일요일의 수행모임과 매주 화요일의 독송모임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봄과 가을에는 초기불전학림를 개설하여 50-60명의 불자님들이 지속적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11기 학림으로 청정도론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제주는 법의 섬 되어 한국불교의 새 희망 될 것”

 


그리고 서울에서는 둘째 일요일에는 공부모임을 셋째 일요일에는 빠알리 원전 강독 공부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오전 시간에는 윤문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30-60명 정도의 불자님들이 늘 동참해주십니다. 그리고 제가 머물고 있는 지리산 실상사에서도 둘째 토요일에 초기불교 공부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 제주에서도 넷째 일요일 오후에 한라정토회에서 초기불교 공부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스님은 초기불교가 시대가 요구하는 미래불교로서 어떤 가치를 발현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우리 현대인들은 온통 과학과 과학을 토대로 발전시킨 기술에 빠져있습니다. 과학이야 말로 이시대의 종교입니다. 과학은 이 종교의 교학에 해당하고 기술은 이 종교의 실천체계 혹은 수행이라고 부르면 너무 과한가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물론 과학과 기술은 인간이 추구하는 이 행복에 답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체계입니다. 저부터 과학과 기술이 없으면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본질적으로는 물질만을 중시하는 유물론 계열에 속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질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종의 필요조건은 되겠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만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삶에는 과학과 기술이 완전히 해결해주지 못하는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늙음 병듦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이 육신이 변해가는 것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느끼고 겪는 괴로움은 철저하게 정신적인 것입니다. 
인류는 앞으로 이러한 정신적 괴로움을 해결하는 쪽에도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일 것입니다. 불교는 2600년 전부터 이 문제에 전폭적인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래서 과학과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킨 서구인들이 지금 불교에 매료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봅니다.
인류의 본질적인 괴로움인 늙음과 죽음에 대한 수준 있는 대처 -- 이것이 미래에 불교가 인류에게 더 본질적인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그 수준 있는 대처가 무엇일 까요? 교학을 통해서 삶의 본질을 더 철저하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바른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meditation 즉 명상이라는 용어로 지금 서구 지성인들이 매료되고 있는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4차산업혁명과 AI 시대를 살아가는 과학만능시대의 불자로서 놓치지 말고 마음에 새겨야 하는 불자의 길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요. 

오래지 않아 AI, artificial intelligence 즉 인공지능에 의한 인조인간이 만들어지겠지요. 그 인조인간이 아무리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인간보다 더 뛰어난 정보처리와 삶의 대처를 하더라고 그것은 정신활동을 흉내 내는 무정물일 것입니다. 인간은 업을 짓는, 즉 의도적 행위를 하는 존재이고 그 업은 또 과보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업과 과보의 작용 속에서 많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겪고 체험합니다. 저는 업과 과보의 흐름이야 말로 생명체의 길이고 특히 고등 생명체인 인간과 신들에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고등 생명체인 우리 인간은 업과 과보의 관계에 눈을 떠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업과 과보의 관계를 깊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 특히 정신에 대한 더 수준 있는 관찰이 필요할 것입니다. 교학적으로 즉 이론적으로는 아비담마의 가르침이 이런 이해의 지평을 크게 넓혀줄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적으로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철저하게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 수행 - 저 마음챙기는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조인간과는 다른 우리 인류가 근본적으로 가야하고 실천해야하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면 업과 과보의 관계를 중심으로 교학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을 자기 내면화하고 생활화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부처님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이처럼 공부하고 수행하는 존엄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몇몇 앞서가는 서구 지성인들이 염려하듯이 아마 우리의 미래는 인조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버릴 수도 있겠지요.

▶끝으로 제주불자들을 위해서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를 담고 있는 디가 니까야 대반열반경(D16)에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라.”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섬[洲]으로 옮긴 단어는 dīpa인데 섬을 뜻하기도 하고 등불[燈]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북방 아함경에서는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라고 옮겼고 우리에게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불전의 다른 용례들로 보면 dīpa는 섬으로 옮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는 것은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四念處]를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챙기는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섬으로 삼아서 이 거칠고 모진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고 열반을 실현하는 고귀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법을 섬으로 삼는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의지처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각묵스님이 역경사업으로 편찬한 초기불교 원전들.

우리 제주도도 섬입니다. 저 태평양의 거칠고 모진 풍파를 맨몸으로 마주하는 섬입니다. 그리고 제주의 선량한 주민들은 대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의지하여 태평양의 거친 파도로 대표되는 세상의 풍파를 극복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주 섬이야 말로 법의 섬(담마디빠)이요 자신을 지키는 섬(아따디빠)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주는 담마 디빠 저 법다운 섬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챙기는 수행을 하여 자신을 지키고 부처님 가르침(법)을 배우고 지켜내는 것이 제주의 불자님들이 가져야 하는 고귀하고 거룩한 마음가짐이라 생각합니다. 한국불교는 지금 교학 공부도 게을리 하고 마음챙기는 공부도 등한시하여서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저 쾌락의 거센 파도에 집어삼켜지는 섬과도 같습니다. 저는 우리 제주가 법의 섬이 될 때 제주불교는 한국불교의 희망이 되고 그래서 제주는 대한민국의 찬란히 빛나는 진주가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법입니까? 역사를 아는 이 시대에는 부처님 원음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가 부처님 원음 - 저 초기불교를 포용할 때 제주는 법의 섬(담마디빠)이 되어 한국불교의 새 희망이 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려 봅니다.

김은희 기자  gimy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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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나난다 2019-09-15 09:48:05

    "어떤 것이 법입니까? 역사를 아는 이 시대에는 부처님 원음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가 부처님 원음 - 저 초기불교를 포용할 때 제주는 법의 섬(담마디빠)이 되어 한국불교의 새 희망이 될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려 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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