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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를 중국의 민본적 사상으로 재해석˙동아시아 사회변혁에 지대한 영향 준 명저[불교 인문학] 혜능과 ‘육조단경’이 아시아 정신사에 끼친 영향

석가모니의 정통적인 수행법 무시하고 돈오돈수 주창해
상좌부에서는 부처의 정통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기도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엄밀하게 따지면 조사어록(祖師語錄)이다. 그러나 그 해박한 사상성과 간결한 문체 때문에 우리 나라·중국·일본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경’과 같은 존숭을 받고 있다.  
육조혜능은 석가모니 이래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깨달음과는 매우 다른, 돈오돈수를 주장했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1년 동안 당대 최고의 명상가를 찾아다녔고, 4년 동안 당시 명성높은 명상가 세 사람에게 최고경지까지 배웠으나 끝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독창적인 수행방법의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즉, 깨닫는데 1년의 명상이 필요했고, 그 후로도 40년간 설법을 하면서 평생 명상을 했다. 부처님의 이 명상법은 아비담마에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흙수저 혜능의 선불교 종조 등극  
육조단경은 중국불교 역사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붙일 수 있는 ‘경’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러한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 육조단경은 역사 속에서 그 가치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종교를 넘어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준 때문이다. 
혜능은 글자를 몰랐다. 도력이 높은 선사와 문맹이라는 이중성에 사람들은 헛갈리는데, 선불교의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심전심의 교지를 이해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혜능은 당나라 태종기인 서기 638년에 태어나 713년에 76세로 입적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어려서부터 나무를 베고 땔감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시장에서 홍인대사 문하의 탁발승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는 단박에 깨달음이 있어 스승을 찾고자 하여 672년에 기주 황매에 가서 홍인대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쌀을 찧으면서 8개월을 보낸 끝에 홍인대사의 상좌인 신수를 물리치고 선종의 법맥을 잇는 가사와 발우를 전수받았다. 
39세에 홍법할 시기가 왔음을 알고 의발보따리를 지고 정처 없이 떠돌다 광주 땅 조계산에 보림사(현 남화사)를 짓고 36년간 전법을 펼쳤다. 이곳은 당·송 시대 사상적 지주였던 선불교의 사실상 진원지이며, 동아시아 선불교의 실질적인 중심지로서, 한국과 일본의 선 수행자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성지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혜능의 진신 육신상이 모셔져 있다. 혜능이 조계의 보림사에서 선풍을 드날리자 소주자사 위거가 청하여 대범사 강당에서 설법을 했는데, 이때 강연한 것을 문하생인 법해가 기록하여 편집되어져 오늘날 전해지는 육조단경이 되었다.      

네가 곧 부처이니 멀리서 찾지 말라 
‘단경’을 통해본 혜능의 사상은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불성론, 돈오견성(頓悟見性)의 수행방법, 자성자도(自性自道)의 세상속의 해탈론 등이다. 
진여연기론은 우주생성과 본체에 관한 기본 관점인데, 진여의 뜻은 참다운 실상이며, 상주불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생겨남도 없고 변화도 없는 영원한 진리, 최고의 원리, 세계의 본체를 가리킨다. 이 자성에서 모든 법이 나타난다고 보는데, 혜능은 자성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실한 체성(體性)을 가리키는 것으로 객관유심론적인 대승불교의 유종(有宗)사상, 즉 피안의 최고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에서 일체가 공(空)하다는 사상과는 차별된다.   
그러나 혜능사상의 가장 중요한 점은 불성론이다. 혜능은 불성을 누구나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며 보리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성품을 떠난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득도를 하고 성불하는데, 중생이 모두 평등하며, 지위의 높낮이, 빈부귀천, 지역과 민족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스스로 만약 불심이 없다면 그 어디에 진불이 있겠는가?”라면서 성품과 마음이 서로 의존하여 성품은 본래 진여불성이고, 마음은 바로 부처와 둘이 아니며, 반야의 지혜를 짊어진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평범한 본성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주의 실체와 세계의 본원인 진여를 모든 중생의 본성이라고 밝힌 것과 그래서 성불의 주체도 본인 스스로라는 것, 바로 눈앞에 있는 나의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혁명적인 선언인가? 
혜능의 또 다른 중요사상은 돈오설(頓悟說)이다. 돈오견성과 돈오성불은 혜능 수행의 중요이론으로, 남종 신수의 점수(漸修)론이라는 오랜 기간 수행이 필요한 것에 비해 대중들에게 큰 흡입력이 있었다. 육조단경에서는 대중이 어리석으면 수만 겁을 수행해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마음의 지혜가 트이면 단 하루만에도 견성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혜능의 업적은 자성자도(自性自道)를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세간(=世俗)안에 득도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좌선을 통해서 입탈좌망하는 명상의 정신적 전변에서 해탈방식에 비판을 가한 그는 정혜(定慧, 생각을 그치고 상황을 관찰하는 것)의 일체론을 주장했다. 즉 ‘정’ 다음에 ‘혜’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상에서 진여불성을 체득해서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정혜가 하나의 ‘체(體)’가 되어야 하며 이것이 ‘관(觀)’이 된다고 했다. 이것에 의하면 선승들은 좌선에서 벗어나 절 밖으로 나오는 이론적 근거가 되며 재가수행자들도 청정함을 닦으면 곧 서방정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혜능은 “법은 원래 세간에 있으므로 세간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것이다. 세간을 벗어나 출세간을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깊은 산속에서 인간세상을 멀리하는 초기선종의 분위기를 크게 변화시킨 이 선언은 불교의 세속화와 인간화를 향해 변하기 시작했다. 득도는 수행방식과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동안의 관행은 부정되었다. 혜능의 주장은 스스로의 몸 안에 있는 자성을 드러내어 스스로 깨닫는 길, 색신(色身)속의 잘못된 견해와 번뇌와 어리석음과 미망은 스스로의 지혜와 스스로의 제도를 통해 본래 청정한 해탈로 가도록 했다. 그래서 중생을 계도하는 보살우상화 이론을 뒤집었고, 인간 자신의 가치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스스로의 자연적 감동 속에 득도의 역량이 내재되어 있음을 자각시켰다. 
 
중국사회의 혁명적 민본주의 의식 고취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주로 경전의 번역과 해석에 의지한 수행이나 신앙으로 시작했으나, 혜능을 거치면서 불교가 가장 중국화 된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수입품인 불교가 달마시기에 능가경을 종지로 삼다가 비교적 간단한 금강경을 넘어 혜능의 단경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의 국산화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선종의 지위는 그래서 달마의 고요한 좌선점수법에서 혜능의 교외별전, 돈오견성이 되었고, 경전에 의지하던 것이 자력해탈로 변모되었다. 심지어 우상과 부처를 초월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성인의 해탈에 의지하지 않는 비(非)우상숭배적 자력해탈을 연 것이다. 
이러한 혜능의 선불교는 점차 중국사상계 전반에 스며들었다. 특히 송명이학(宋明理學)은 교외별전인 선종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이전의 유가 인륜철학은 경소의 주석학에 그쳤는데, 육조단경의 출현이후에는 인간의 기본문제인 심성이행지와 우주본체에 대한 이기론이 발전되었다. 주돈이, 정이, 정호, 주희, 육구연, 왕양명 등의 인물로 대표되는 송명의 이학사상은 주돈이-혜명선사의 교류, 주희-대혜종고의 교류, 육구연-덕광선사의 교류와는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육구연과 왕양명은 평소 ‘육조단경’을 가까이 두고 마음의 지침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이렇듯 혜능의 단경은 단지 불교 철학적 발전의 한 모습이지만, 그 속에는 봉건적인 전통문화를 타파하는 정신혁명과 사상혁명의 배아가 들어있었다. 단경이 중국의 전통문화 속에서 일으킨 반향은 많은 학자들의 민본적 민주사상 속에 구현된 것들과 문학, 회화, 문인의 풍조 등에서도 영향을 지대하게 미쳤다. 왕유같은 이의 선시는 말 그대로 문자선(文字禪)을 향유했으며, 이후 상건, 교연, 소식, 황정견, 범성대와 청나라시기의 신운파, 왕사정도 심오한 정신세계와 맑고 잔잔하며 담담한 선시를 남겨 사람들의 지혜를 일깨웠으며 창작삼매(創作三昧)의 경지를 넓힌 것이었다.  

육조단경은 반야중관 사상을 잇는 적통
전남대학교 철학과 이중표 교수는 육조단경의 핵심 사상이 반야 사상이며, 용수 대사의 중론(中論)을 통해 중관 사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혜능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잇고 있으며, 그 내용은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智慧), 즉 반야(般若)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와 선정과 지혜가 분리되지 않으며, 선정과 지혜를 닦을 때 그를 수행자라고 부르므로, 즉 선정과 지혜를 수행하는 실체로서의 수행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무아(無我)를 스스로 깨달아 수행할 것을 강조한 것이 정혜일체(定慧一體), 정헤즉등(定慧卽等)이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단경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이 반야인가? 반야는 지혜이니 언제 어느 때나 생각생각 어리석지 않아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반야행이다.”는 것에서 반야행을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주(無住)의 선정(禪定)에서 행해지고 반야(般若)는 선정과 일체로서 항상 함께(卽等)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상좌부의 아비담마 초기경전들이 현상들의 무상(無常)과 상호작용은 강조했지만 현상들의 존재론적 본질을 분석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아비담마 학자들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요소들, 즉 제법의 고유한 특성을 확정하려고 시도했다고 지적한다. 즉 반야경의 반야(般若)․공(空) 사상은 아비담마에 의해 실체화되고 왜곡된 불법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며, 아비담마불교에서의 열반을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봄는 생사와 열반을 이분법으로 본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열반을 구하여 얻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 아라한은 그러한 열반을 얻은 자라는 것을 반야경에서는 생사와 열반의 실체론적 구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수행이 생사의 세계를 떠나 열반의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생사의 세계이고, 진실을 바로 보며 살아가면 그것이 열반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육조단경의 반야․중관 사상의 취지라는 것이다.
      
아비담마가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
이러한 주장에 대해 초기불전연구원의 지도법사이며 수많은 초기경전을 역경한 각묵 스님은 강력하게 비판한다. 중도는 초기경에서 보면 맛지마 빠띠빳띠(majjhimā patipatti)로 중국에서 ‘행도(行道)’라고 옮기고 있으며 ‘도닦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중도란 ‘초전법륜경’ 등에서 팔정도라고 명료히 밝히고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모든 법이 무상․고․무아라는 보편적인 성질을 가진다고 강조하고 있고, 제법의 무상 ․고 ․ 무아를 꿰뚫어 봄으로 해서 해탈열반을 성취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래서 무상과 고와 무아는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바로 제법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을 척파하기 위해서 제법을 분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설하신 제법을 고유성질과 보편적인 성질로 동시에 관찰하려는 태도야말로 원융한 가르침이며, 무상 . 고 . 무아의 세 가지 특상 가운데서 유독 ‘무아’라는 하나의 특징만을 공이라는 명칭으로 강조하는 ‘반야 . 중관’의 가르침이야말로 독선적이고 편협하고 바르지 못한 태도라고 지적하고 있다. 각묵 스님은 만일 ‘반야 . 중관’의 가르침이 최상의 가르침이라 한다면 왜 다시 유식이 등장하며 여래장, 밀교 등은 왜 대승불교에 등장하는지 반문하고 있다. 
나아가 상좌부 아비담마에서 출세간은 욕계 ․ 색계 ․ 무색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로 결코 설명하지 않으며, 단지 열반을 실현한 성자들의 마음의 흐름들을 출세간이라고 구분짓고 있는 것이며,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 안에 각각 작용만하는 마음(kiriya-citta)이라하여 여러 가지의 마음들을 구분하여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비담마는 지금 여기 내 안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며, 제법의 무상 ․고 ․ 무아를 여실지견하지 못하면 그것은 중생의 세계요,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꿰뚫어보면 그것이 바로 열반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아비담마는 이러한 초기부처님의 고구정녕하신 말씀을 그대로 잇고 있다고 주장한다.                        

/편집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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