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세이 - 마음의 지문
상태바
명상에세이 - 마음의 지문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0.23 1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 현

가을이 깊어 간다. 나의 과원果園에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밭에는 감과 귤이 노랗게 익어가고, 뜰엔 노란 산국山菊과 털머위꽃이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봄에 싹이 트고, 여름의 땡볕으로 성장하고, 가을엔 열매를 맺게 하는 자연의 섭리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자연은 이렇게 변화무쌍한데, 모태에서 생겨나서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손가락 마디 끝에 생긴 지문指紋은 사람마다 다르며 평생 변하지 않아 범죄 수사에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살면서 손길 닿는 곳에 어김없이 지문을 남긴다. 애지중지하는 물건일수록 지문은 켜켜이 쌓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지문이 있다. 마음은 모양도 냄새도 소리도 없어서 저 스스로 표현할 수 없지만 말하거나 글 쓰거나 몸짓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면서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지문을 들여다보는 공부는 그윽한 갓밝이 좋다. 결코 쉽지 않고 가볍지 않았지만 시간은 나에게 성찰의 선물을 가져왔다. 전생의 업보가 죽음과 탄생의 순간에 재생의 마음을 통해 모태에 들어가고, 또 금생의 업이 내생에 상속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업(Kamma)이란 생각과 말과 몸으로 의도하고서 착하거나 나쁜 결과를 낳게 하는 정신적 흐름이다. 업과 과보의 회전에 따라 유정有情들에겐 마음의 지문이 생겨나고 변한다.  
마치 씨앗을 심으면 적절한 흙과 습기를 만나 발아해서 싹이 트고 그 종자에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이 마음의 지문은 모태에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경험과 학습의 과정을 통해 생겨나고 머물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선한 업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를 둘러싼 환경 역시 훌륭하다. 중생들의 업이 좋고 나쁨은 그들의 마음 지문과 연기적 관계에 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등이 과도하다면 업은 자연히 좋지 않는 방향으로 기운다.
윤회 또는 재생이라는 것은 인과적 생성원리에 따라 업에 의지하여 업보로부터 모태와 태어날 곳이 생기는 것일 뿐이고,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있어서 그 업보에 따라서 태어날 곳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붓다의 사자후가 큰 울림으로 뼈에 사무친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내 마음에도 업의 나이테가 있고 더러 옹이가 있을 것이다. 촘촘하게 온 몸을 움켜쥔 나이테는 탐욕과 성냄을 견뎌내느라 그랬던 것이고, 단단한 옹이의 향기는 거칠고 힘든 삶의 상처가 아물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초기불교에 의하면, 업은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서 금생에 받는 업, 다음 생에 받는 업, 받는 시기가 확정되지 않는 업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되지 않는 한 자기가 지은 업은 반드시 언젠가는 받아야 한다.
이 몸뚱이는 과거의 업보를 소유함과 동시에 현재의 업에 의해 새롭게 바뀌어가고 있기에 늙을 막에 봄꽃보다 가을의 단풍으로 변신하고자 아등바등 애쓴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몸 받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처럼 희유하다고 말한다. 금생에 삼악도와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나 마음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지 아니한가.
 악업의 두려움을 반조해 본다. 살생하면 단명하고, 남을 해치면 질병이 많고, 화내고 성내면 용모가 추하고, 질투가 심하면 권세가 없고, 보시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되고, 완고하고 오만하면 비천해지고, 착하고 건전한 업을 모르면 우둔한 자로 태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업은 팔십 아홉 가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업의 길에서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지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