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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어려울 수 있다
김대규 화백은 1987년 광주 남도예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로 미국과 중국, 인도, 네팔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걸쳐 총 20회의 개인전을 가진 중견화가이다. 이뿐만 아니라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고법 이수자로 지난 2010년에는 제주아트센터에서 3시간에 이르는 수궁가를 완창했다. 저서로는 시화첩“지금도 부르고 싶은 사랑가”, 판소리수궁가 사설집 등이 있다. 현재 사단법인 로천 예악진흥협회 이사장으로 있으면 우리 예술의 깊이 있는 매력을 전하는데 힘쓰고 있다. 평생 불교신행과 다양한 수행을 해 오던중 기존의 수행법으로는 큰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는 자각에 따라 지난 2014년부터 미얀마 쉐우민명상센터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였고, 이듬해부터 파욱명상센터에서 수행을 해오고 있다. 앞으로 총 6회에 걸쳐 수행의 체험적 이야기를 소개하여 불교수행에 대한 도움을 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우린 죽어보지 못해서 모른다. 그런데 서울을 안 가본 자가 가본 자보다 서울을 더 잘 안다는 말이 있다. 분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죽음은 체험이 곤란하니 수행의 체험이 대신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수행에서 얻은 체험이라면 진리가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인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곧 수행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역사를 이루신 분이 우리가 잘 알고 있으나 너무나 모르고 있는 단 한 분,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수 천년 동안 수많은 인간들이 부처님의 수행을 공부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필히 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대략 29여년 전 어떤 지인의 주선으로 네팔 여행을 하면서 경험했던 일들의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몇몇 큰스님들을 힘들게 찾아뵈었으나 여의치 못했으나 그중 한 스님의 흘리는듯한 말씀이 내 가슴에 박혔다. 
네팔 큰 스님은 “부처 본연의 공부를 하려거든 미얀마로 가는 게 좋을걸...” 이라는 말씀을 했고, 부처님의 수행방법대로 수행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살아있는 미얀마를 가야한다는 것이 나의 목적이 되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즈음 어렵사리 미얀마에 발을 딛게 되었고 천우신조로 양곤 인근에 있는 쉐우민 명상센터에 입소하여 ‘사티’를 익히며 위빠사나의 맛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작된 수행은 오문으로 느껴지는 모든 대상을 알아차리고 내 몸 안에 일어나는 모든 증상이나 대상을 알아차리며 내 속에 뛰는 맥박의 진동과 소리를 즐기면서도 내심 미심쩍은 불만과 의문이 있었다. 
이런 과정이 과연 맞는 것인가? 잘하고 있는 건가? 이래가지고 무엇이 공부가 된다는 것인가?
앞서가는 도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티 중에 신비한 희열을 느낀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멋져 보이고 부럽던지. 나 자신이 초라하고 보잘 것 없이 생각되면서 의기소침하고 있었다. 
감은 눈으로 보이는 화려하고 요란한 불꽃놀이나 광채의 난무를 견디기도 두렵고 해석은 커녕 질질거릴 정도로 나로선 감당이 버거워 혼돈 속에 헤매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명상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거룩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부지불식간에 명상을 만나 나를 잃어버리고 고통도 고독도 잊고 앎과 고요 속에 안정만이 존재하는 편안함만을 즐기다보니 생활이 곧 수행이 되고 수행이 곧 삶이며 그런 삶이 천국이려니 단정 짓고 지냈었다. 
그러나 이게 아닌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의문과 답답함을 느끼며 어떤 장벽에 막힌 듯 고답스런 시간을 수행이라며 인내하고 있을 무렵 훔쳐보듯 읽게 된 몇 줄 논장을 접했다. 
부처님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인간은 업장을 지우기 위해 일생을 사는 것이고 죽음은 그 업을 다하는 것이란다. 다시 말하면 전생의 업장을 지우기 위해 금생을 사는데 그 금생을 사는 동안 새로이 지은 업 때문에 내생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 금생의 업을 지우기 위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인간의 금생은 연기법이라는 인연으로 언제까지일지 모를 일이다. 그것은 아라한이 아시고 부처가 아신다니 나도 공부해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논장의 이론만을 공부한다면 그것이 수행이란 생각이 들지 않고 수행을 통한 논장의 이해만이 있을 수 있는 수행이란 막연한 짐작을 하며 교학에 대한 세부적 관심을 우선에서 놓아두고 수행에 치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쉐우민센터의 수행은 나같은 촌놈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눈뜨게 해주었다. 나로서는 모두가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고 우연한 일뿐이지만 어찌어찌한 우여곡절 끝에 파옥명상센터에 입소했고 코끝호흡에만 집중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명상(사마타)을 3일만에 그 호화롭고 요란하던 광채며 불빛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깊은 바닷속에서 처럼 고요와 침묵의 허공만이 일을 뿐이었다.
뭔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며 일면 들뜸이 있었으나 모두 무시하고 호흡에만 집중하라는 주문을 받았다. 


하루 앉아 있는 시간이 도합 9시간 정도를 유지하며 나머지 시간은 쉬거나 자거나 청소, 세탁, 식사, 목욕, 산책 등으로 그저 그러저러한 시간을 보내기를 열흘쯤 지냈을 때 보지 못했던 새로운 원반 형태의 빛이 나타났다. 며칠 지나 똑같은 광채가 또 하나 생겨 두 개의 광채가 양쪽에서 서로 다가와 서로 합쳐서 하나를 이루더니 코앞에 자리를 잡고 자연스럽게 고정되었다. 
솜사탕 같은 느낌의 흰색 니밋따는 내 몸의 일부인 듯 친숙하고 정겨웠으나 5분정도 유지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나는 지침에 따라 그럴수록 리밋따를 보지 않고 인중을 지나가는 들숨날숨에만 집중했다. 
리밋따가 머물러주는 시간은 점차 길어지기 시작했고 리밋따가 유지되는 동안은 그저 고요하고 평화롭고 안정감에 편안하고 만족할 뿐이었다. 
그러한 시간은 점차 길어져 90분에 다달았을 때는 거의 2년이 다되었을 무렵이었다. 
사야도께서는 “세 시간을 유지하라”는 지침을 주셨다. 리밋따 유지가 60분을 달성 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집중을 호흡에서 리밋따로 옮기거나 다시 호흡에 집중하거나 하는 것을 수시로 반복하게 되었다. 
리밋따가 뜨는 것은 앉자마자 19초 이내에 발생하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피곤하거나 졸림이 있다가도 앉아서 리밋따가 뜨는 동시 몸과 정신상태가 명쾌하고 가벼워지며 시간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형편상 수행을 일시 중단하고 파옥을 떠나 귀국하게 되었다. 주위 도반들은 나의 수행방식을 크게 꾸짖으며 3년 정도 머물면서 수행을 완수하라고 조언했다. 막연하고 답답했으나 현명하신 스승과 우매한 제자의 설화를 떠올리며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뭔가가 되기는 하겠지 하는 건방도 버리고 착해야한다는 생각을 다지고 다져본다. 
쉐우민센터에서 두 차례, 파옥센타에 두 차례 수행이랍시고 했다지만 무엇이 얼마나 매워지고 얻었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그 와중에 만난 많은 요기들과의 귀한 인연과 다른 수행자들의 수행실상을 엿본 것 또한 내게 주어진 중요한 인연들 아니겠는가? 요샛말로 IQ140이 넘는 천재수행자도 있었고, 30대 젊은 혈기를 누르고 여섯 평 남짓 작은 공간에 10여년을 홀로 못 박혀 지낸 잘 생긴 수행자도 보았고, 이제 다섯 살 난 동자가 수행이랍시고 새벽 세시에 일어나 청소하고 목욕하고 참선하고 아침 먹고 울력하는 등등 하루하루를 수행이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꼬마수행자를 보며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비교해본다.
내가 본 수행센터에는 대부분 적게는 400명에서 많게는 천여 명에 달하는 많은 요기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중 95%가 출가하여 계를 받으신 스님들이며 겨우 5%정도가 머리를 기르고 출가하지 않은 재가불자인데 그것도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며 내가 있던 파옥센터에는 한국인이 나를 포함하여 3명이 전부였다. 
공인되지 않은 공공연한 비밀은 천 여 명의 수행자 중에서 초선정(첫 선정)에 든 자가 열 명을 넘지 못하고 리밋따를 보는 자는 몇 십 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그곳에 머무는 기한이 수년도 수십 년도 아닌 평생을 투자하고 있는 자가 대부분이라고 하니, 시간이 아까운 사람도 부지불식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잡시 들렀다 돌아가고 또다시 불쑥 나타났다가 금방 돌아가는 내가 어떻게 보였을까 궁금했더니 누군가 내게 그 답을 주었다. 
그들은 자기수행도 바쁜데 나의 행실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란다. 나는 내 스스로 참 복잡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잘못하면 정말 어려울 수도 힘겨울 수도 있을게야. 이것은 이기주의, 나만의 에고와는 다른 말이다. 
그 많은 수행자들에게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단다. 그러니 나 또한 그들 걱정은 말고 오로지 내가 중요하고 나의 수행이 소중하고 나의 리밋따가 귀중할 따름이다.
사두! 사두! 사두!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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