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론顯正論​ - 불교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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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론顯正論​ - 불교의 특성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1.2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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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불교 고전읽기 - 함허 기화(涵虛 己和)

이 글은 함허 기화(涵虛己和, 1376~1433)의 현정론(顯正論)중 제1장‘불교의 특성’이다. 현정론은 유교의 불교에 대한 비판을 이론적으로 논박한 글이다. 고려말 이래 많은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이 나왔고, 이를 대표하는 것이 조선 초에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佛氏雜辨)>이다. 기화의 현정론은 이런 비판에 대한 불교계의 대표적인 반론이다.
기화는 성이 유씨(劉氏)이고 본관은 중원(中原)이며 부친은 정3품의 빈객시사(賓客寺事)를 지냈고 모친은 방씨(方氏)이다. 부모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 관음보살에 기도하여 기화를 낳았다 한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행동을 보였으며 공부할 때는 한꺼번에 많은 글을 기억하였다.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여 깊이 통달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는 등 유교적 환경에서 자랐다. 21세 때인 1396년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을 느껴 관악산 의상암으로 출가하여 법명을 수이(守伊), 법호를 무준(無準)이라 하였다. 출가 동기와 관련하여 이 <현정론>에서는 유교에서 인을 강조하면서 살생을 금하지 않는데 의심을 품고 있다가 불교의 불살생 사상에서 깨우침을 얻어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출가 이듬해에 회암사에 가서 당대의 고승인 무학(無學)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나옹혜근(懶翁慧勤)-무학자초(自超)-기화로 이어지는 선맥을 계승하였다. 무학의 입적 후 1406년 회암사를 떠나 상주 대승사에 가서 4년간 <금강경>을 강의하고, 1410년에 개성의 천마산 관음굴에 가서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141년에 불희사(佛禧寺)에서 3년 결제하며 대중들을 이끌었고 1414년 평산의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峰寺)에서 3년 동안 수행하고 지낼 때 당호를 함허당이라 하였으며, 여기서 <금강경오가해>를 강설하였다. 1420년에 오대산 영감암(靈鑑庵)에 머물다 꿈에 신인이 주었다는 기화를 법명으로, 득통(得通)을 법호로 사용하였고, 1421년 세종의 요청으로 고양의 대자사(大慈寺)에 가서 왕실천도법회를 주관하였다. 1424년부터 길상산 공덕산 운암산 등을 유력하다가 1431년 문경 봉암사에 들어가 절을 중수하고 머물다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현정론> 외에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2권, <금강경윤관(金剛經綸貫)>1권, <원각경설의(圓覺經說誼)> 3권, <선종영가집과주설의(禪宗永嘉集科註說誼)>2권이 있고, 시문과 설법 등을 모은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1권이 있다. /편집자 주

 

정수사 함허 대사 부도탑

본체[體]로는 있고 없는 것이 아니지만 유무(有無)에 통하고, 근본[本]으로는 옛과 지금이 없지만 고금(古今)에 통하는 것이 도(道)이다. 유무는 성정(性情)을 원인으로 하고, 고금은 생사(生死)를 원인으로 한다. 성(性)에는 본래 정(情)이 없지만 성에 미혹하면 정을 일으키게 된다. 정이 생겨나면 지혜가 막히고 생각[想]이 변하면 체(體)가 달라지니, 만상(萬象)이 이 때문에 형성되었고 생사가 이 때문에 시작되었다. 정에는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이 있고 착함[善]과 악함[惡]이 있으니, 깨끗함과 착함은 성인이 생겨나는 원인이고 더러움과 악함은 범부가 되는 원인이다. 그러므로 정이 만일 생기지 않으면 범부도 성인도 모두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살(菩薩)은 성(性)에 대해서라면 이미 깨달았지만 정(情)에 대해서라면 아직 다 없애지 못하였기 때문에 ‘깨달은 유정[覺有情]’이라 부른다. 보살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 나머지 이승(二乘)이야 어떠하겠으며, 삼승(三乘)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과 천신 등의 다른 부류들이야 어떠하겠는가? 부처님은 깨달음이 충만하여 지혜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고 깨끗함이 지극하여 정으로 인한 번뇌가 다 없어졌기 때문에 정이라는 말은 부처님에게 붙이지 않는다. 오직 부처님 한 분 이외에 모두를 유정(有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저 삼승이나 5승(五乘)은 모두 그에 맞는 정을 다스리니, 인승(人乘)과 천승(天乘)은 더러운 번뇌[染垢]를 다스리고, 삼승은 깨끗한 번뇌[淨垢]를 다스린다. 더럽고 깨끗한 번뇌가 다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대각(大覺)의 경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5계(五戒)는 인간 세상에 태어나는 길이고, 10선(十善)은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길이며, 4성제(四聖諦)와 12인연(十二因緣)은 이승이 되는 원인이요, 육바라밀[六度]은 보살이 되는 원인이다. 가만히 삼장(三藏)의 귀결점을 살펴보니,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정(情)을 제거하여 성(性)이 드러나도록 할 따름이다. 정이 성에서 생겨나는 것은 구름이 넓은 하늘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고, 정을 제거하여 성을 드러내는 것은 구름이 걷혀 맑은 하늘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구름에 옅은 것과 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정에도 엷은 것과 두터운 것이 있다. 구름에 진하고 옅음의 차이가 있으나 하늘의 광명을 가리기는 마찬가지이듯이 정에 두텁고 엷음의 차이가 있으나 성의 밝음을 막기는 마찬가지이다. 구름이 일어나면 해와 달이 빛을 거두어 천하가 캄캄해지고, 구름이 걷히면 광명이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비추어 우주가 탁 트이리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기에 견주어 보면 마치 맑은 바람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을 것이니, 탁 트인 하늘을 보고자 하면서 맑은 바람을 싫어하는 것은 미혹한 것이요, 나와 남이 태평하기를 바라면서 우리 도(道)를 싫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이러한 것에 의지해 닦게 한다면 마음이 바르게 되고 몸이 닦아지리니,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태평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근기(根機)가 뛰어난 자는 보살이 될 수 있고 성문이 될 수 있고 연각이 될 수 있으며, 근기가 열악한 자는 천상에 태어날 수 있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하고서도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다.

함허 대사가 새겼다는 함허동천 음각


왜 그런가? 죄의 과보(果報)를 싫어한다면 모든 악(惡)을 끊어야 하는 데, 비록 악을 모두 끊어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한 가지 악은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악을 제거하면 한 가지 형벌이 없어질 것이고, 한 가지 형벌이 집집마다 없어지면 만 가지 형벌이 나라에서 없어질 것이다. 복의 인연을 기꺼워한다면 모든 선(善)을 닦아야 하는데, 모든 선을 비록 다 닦지는 못하더라도 한 가지 선은 충분히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선을 실천하면 한 가지 경사를 얻게 될 것이니, 한 가지 경사가 집집마다 생겨나면 만 가지 경사가 나라에서 생겨날 것이다. 오계와 십선은 가르침 가운데 가장 낮은 것으로 본래 근기가 가장 낮은 자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실로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으면 자신을 진실되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니, 하물며 사성제와 십이인연의 가르침에 있어서이겠으며, 하물며 육바라밀의 가르침에 있어서이겠는가?
유교는 오상(五常)을 도(道)의 중추로 삼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五戒)가 곧 유교에서 말하는 오상이다. 살생하지 않는 것[不殺]은 인(仁)이요, 도둑질하지 않는 것[不盜]은 의(義)요, 사음하지 않는 것[不淫]은 예(禮)요, 술 마시지 않는 것[不飮酒]은 지(智)요, 거짓말하지 않는 것[不忘語]은 신(信)이다. 다만 유교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덕행(德行)으로써 하지 않고 정사와 형벌을 가지고 한다. 그러므로 “정사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형벌은 면하겠지만 부끄러움이 없고, 덕(德)으로써 이끌고 예(禮)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고 또 바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는 것은 성인이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없으므로 “묵묵히 있어도 이루어지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 것은 덕행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정사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상벌(賞罰)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므로 “상주고 벌주는 것은 나라의 큰 권력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릇 ‘묵묵히 있어도 이루어지고 말하지 않아도 믿는다’는 것은 진실로 우리 부처님의 교화인데 게다가 인과법(因果法)도 아울러 가르치셨으니, 상벌로써 가르치면 아마도 면전에서만 복종할 뿐이겠지만, 인과법으로써 가르치면 복종할 때 마음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만일 상을 주어 권장하고 벌을 주어 금지한다면 악(惡)을 그치는 자는 그 벌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그칠 것이고, 선(善)을 행하는 자는 그 상을 이롭게 여겨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화를 따름이 면전에서만 복종할 뿐이고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현재 궁핍하거나 영달한 이유를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숙업의 종자[宿種]로써 가르치고 훗날의 화(禍)와 복(福)을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 현재의 원인[現因]으로써 가르친다면, 영달한 사람은 전생에 선의 종자를 심었던 것을 기뻐하여 더욱 부지런히 실천할 것이고, 궁핍한 사람은 전생에 닦지 않았던 것을 참회하여 스스로 힘쓸 것이며, 또 내생에 복을 받으려는 사람은 착한 일을 부지런히 행할 것이고, 내생에 화를 피하려는 사람은 악한 짓을 반드시 삼갈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복종한다면 마음으로 복종할 것이요 면전에서만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떻게 사람들을 저마다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게 할 수 있는가? 아직 마음으로 복종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우선은 상벌을 가지고 인도하되 빨리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복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인과법으로써 가르친 것 외에 또한 상벌의 가르침도 주셨던 것이니, 이른바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이고, 굴복시킬 만한 사람은 굴복시킨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러한 점은 유교와 비슷하다. 따라서 유교와 불교가 모두 폐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들려고 하실 적에 그러한 법으로써 군주들과 신하들에게 부촉(付囑)하셨으니, 이는 올바른 도로써 천하 사람들을 인도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 위함이고, 그들로 하여금 진리를 수행하는 길로 함께 나아가게 하고자 함이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재가(在家)와 출가(出家)를 가리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이 도의 작용을 어기지 않도록 하는 것일 뿐이니, 반드시 머리를 깎고 옷을 달리한 이후에야 그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방편에 따라 번뇌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을 임시로 삼매(三昧)라 이름 한다”고 하였고, 또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을 아뇩보리(阿耨菩提)라 이름 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좁은 통로이겠는가? 그러나 만일 참아내는 힘[忍力]이 없는 자라면 티끌세상에 살면서 오염되지 않고 속가에 머물면서 도를 이루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출가하여 원리행(遠離行)을 닦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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