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윈강석굴(雲岡石窟) 사원 (2)
상태바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윈강석굴(雲岡石窟) 사원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2.12 14: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
윈강석굴 6동 동벽중층 남측의 초전법륜상
윈강석굴 6동 동벽중층 남측의 초전법륜상

 

산시성 다퉁(大同)에 있는 윈강석굴사원, 우리나라 한자 발음으로 대동시에 있는 운강석굴은 베이징에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혹 오대산 순례를 계획한다면 가는 길에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중국에는 여러 곳의 석굴사원이 있다. 우리나라는 암반이 대부분 화강암이어서 굴을 파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화강암보다 훨씬 무른 사암 계통의 암반이 있는 곳에서는 굴을 파서 사원을 만들었다. 이러한 전통은 인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명한 아잔타, 엘로라 석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을 동원해 굴을 파서 사원을 만드는 전통이 중국에 전해져 곳곳에 석굴 사원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윈강, 룽먼(龍門), 둔황(敦煌) 석굴 외에도 맥적산(麥積山), 병령사(炳靈寺), 천룡산(天龍山), 공현(鞏縣) 석굴과 실크로드에 있는 키질, 베제클릭, 쿰트라 석굴 등이 유명하다. 이 외에도 소규모의 석굴을 파서 만든 사원이 적지 않다. 땅이 크고 인구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과 경제력 및 신심이 작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특히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국가인 북위, 동위, 서위, 북주, 북제 등에서는 불교를 통해 한족을 쉽게 지배하려고 했고, 불교계에서는 북위 태무제에 의한 폐불 사건을 계기로 이민족 황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불교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맞물려 탄생한 것이 바로 하여 담요가 북위 황실의 후원을 받아 조성한 윈강석굴이다. 
윈강석굴이 조성된 절벽은 미세한 사암으로 되어 있어 조각하기가 비교적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홍수나 비바람에 취약하다는 단점도 있다. 그러다보니 일부 석굴에서는 홍수로 마모된 부분도 있다. 이 윈강석굴은 460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북위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긴 494년까지 만들어진 50여 개의 석굴로 이루어졌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담요가 조성한 제 16, 17, 18, 19, 20동인 담요 5굴이다. 윈강석굴에 있는 가장 큰 석불들은 이 담요 5굴이 만들어지는 460년부터 46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들 석불 조성에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과 북위의 다섯 황제를 위해 조성한 국가 불교적인 성격이 반영되었다. 그러다 보니 불상이 힘이 가득 찬 당당한 신체에 깊게 패인 눈과 오똑한 코를 지녔고, 살집이 많은 얼굴로 표현되었다. 법의는 중국식 복식이 아닌 인도풍의 옷에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형식이다. 

윈강석굴 6동 중심 기둥 하층 서북면 장면
윈강석굴 6동 중심 기둥 하층 서북면 장면

 

 담요 5굴 이후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만들어진 대표적인 굴로는 제 5, 6, 7, 8, 9, 10, 11동이 있다. 5동과 6동, 7동과 8동, 9동과 10동은 황제와 황후, 황제의 어머니를 위해 조성된 쌍굴이다. 이 굴들에 조선된 불상들은 서역의 영향에서 벗어난 보다 중국화 된 양식이 나타난다. 이는 486년 북위 황제가 중국식 복식을 공복으로 정하는 등 본격적으로 한화 정책을 시행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즉 불상은 이전의 풍만한 체형에서 좀 더 마른 체형으로 바뀌고, 가슴 부분에 옷고름을 표현한 중국식 복장을 한 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상은 같은 시기의 금동불과 석불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들 불상 양식은 우리나라 고구려나 백제의 불상에도 나타난다.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난 뒤 윈강에서는 하급관리나 일반인들이 개인적으로 조성한 작은 석굴은 있지만 이전처럼 큰 석굴과 불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전하는 윈강 석굴사원은 460년에서 494년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 되고, 황실에서 후원한 것이므로 조각 기술이 뛰어나 중국 불상 조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윈강석굴에서 가장 호화롭고 정비가 잘 된 굴은 제 6동이다. 5동과 함께 쌍굴로 만들어졌으며 굴 앞에는 각각 4층 누각이 세워졌다. 건물 1층이 석굴 입구로 들어가는 곳이고, 석굴이 만들어질 때 빛이 들어오도록 낸 창문은 3층에 해당한다. 현재의 건물은 명나라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본다. 석굴은 거의 사각형이며 굴 중앙에 탑 모양의 사각 기둥이 있고, 네 면에는 불상과 다양한 조각이 화려하게 장엄되었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중앙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네 면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과 불화를 봉안한 것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둥 정면에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탑돌이 하듯 돌면서 예불할 수 있다. 물론 석굴 안의 다른 벽도 다양하게 조각되었는데, 따스한 느낌이 드는 색으로 칠해져 있다. 

윈강석굴 6동 중심 기둥 하층 불전 조각 중 "수하탄생" 장면
윈강석굴 6동 중심 기둥 하층 불전 조각 중 "수하탄생" 장면

 

굴 벽면은 남쪽으로 난 빛이 들어오는 창 아랫면을 경계로 상하 이층으로 나누어 통일되게 조각되었다. 조각들 중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불전 조각은 윈강석굴에서 가장 다양하고 뛰어나다. 특히 중앙의 기둥에는 부처님의 탄생 장면부터 유성출가, 설산수도, 항마성도, 초전법륜, 가섭의 귀의 등 다양한 장면이 있는데, 이상하게 열반 장면은 표현되지 않았다. 7동, 8동, 12동에도 여러 장면의 불전도가 있지만 이 6동에서처럼 연속성 있고 일관되게 표현되지는 않았다.
사진은 중심 기둥 서북면 모습이다. 각 면 중앙을 안으로 움푹 들어가게 파서 불상을 조각하였고 그 주변을 보살상, 불전도, 화불과 비천, 공양자상 등 다양한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다. 다른 사진은 룸비니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탄생하는 수하탄생 장면과 동벽중층남측에 표현된 초전법륜 장면이다. 불상 아래에 녹야원을 상징하는 사슴 두 마리가 묘사되었고, 주변에는 공양자들의 모습이 표현되었다. 당초문 띠 아래에는 구획을 나누어 불전도가 조각되었다. 색이 벗겨졌지만 은은한 색감이 딱딱한 돌의 질감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굴 안에 들어서면 화려한 부처님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