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마음뿐! 마음만을 그렸던 여류화가 아그네스 마틴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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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마음뿐! 마음만을 그렸던 여류화가 아그네스 마틴 ②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2.1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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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홍성미 _ 컬럼비아 대학 아동미술 박사과정

<제주불교>는 <미주현대불교>(발행인 김형근)와의 기사제휴를 통해 미국에서의 불교활동을 소개한다. 이 글은 평생 개인 소유물을 지니지 않고 마음의 산란함을 방지하고자 50여년간 신문도 읽지 않으며 오직 선의 경지만을 추구하며 소박한 삶을 살다 간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세계를 섬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삶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아그네스 마틴의 마음 연작
아그네스 마틴의 마음 연작

 

사람들은 극도의 아름다움이나 극도의 처참한 상황을 보았을 때 “숭고함” 이란 것을 느낀다고 한다. 18세기말에 시작해 1800-1850년 사이에 정점을 찍었던 낭만주의. 이러한 낭만주의를 대표했던 독일 화가 케스퍼 데니비드 프레드릭(Caspar David Friedrich)은 높은 산 정상에서 구름으로 가득 찬 대자연을 바라보는 그림,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라는 작품을 통해 자연 속에 담겨있는 숭고의 미학을 표현하려고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한 퇴역 군인 역시 당시 참혹했던 전장의 모습을 회상하며, 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느꼈던 것은 바로 “숭고함”이었다고 한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을 통해 필자가 느꼈던 건 무엇이었을까? 다시 고개를 들어 갤러리에 걸린 수 많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들을 바라보았다. 필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이 아닌, 아그네스 마틴 그녀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도 아름답고 따뜻했다.

늦게 핀 예술가
1912년 캐나다 사스카추완(Saskatchewan)의 스코틀랜드계 농가에서 태어난 아그네스 마틴은 20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92년이라는 인생을 살았다. 태어난지 2년 만에 아버지를 잃은 그녀는 쉽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고, 학업 때문에 미국에 정착한 후에도 생계유지를 위해 많은 직업을 가져야만 했다. 서른살이 넘어서 화가의 길을 선택했던 그녀는 1957년 뉴욕의 아트 딜러였던 베티 팔슨스(Betty Parsons)로부터 뉴욕 전시를 제의 받는데, 그녀의 나이 45세였다. 그녀의 잠재력을 알아 보았던 베티 팔슨스의 제안으로 아그네스 마틴은 뉴욕 로어 맨해튼, 코엔티스 슬립(Coenties Slip)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그 당시 코엔티스 슬립은 미국의 가난한 젊은 화가들이 모여 사는 예술가촌이었고,제스퍼 존스(Jasper Johns),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엘스월스 켈리(Ellsworth Kelly),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버넷 뉴먼(Barnett Newman)등 1950대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이끌었던 예술가들이 모두 이 코엔티스 슬립의 이웃들이었다. 아그네스 마틴은 특히 로버트 인디아나(Robert Indiana), 잭 영거먼(Jack Youngerman), 앤 윌슨(Ann Wilson)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녀는 독서 클럽을 만들어 다른 예술가들과 서로의 사상과 철학을 교류했는데, 윌리엄 블레케(William Blake), 걸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동양 선불교 선승들의 글, 그리고 노자(Lao Tze)의 문학과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1967년 뉴욕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아그네스 마틴은 돌연 뉴욕생활을 완전히 정리한다. 뉴욕생활뿐만 아니라 그림까지도 정리한 그녀는 캠핑카를 이용해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하며, 약 18개월 동안의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정착한 곳은 미국 남서부에 위치한 뉴멕시코(New Mexico)였다. 뉴멕시코는 미국의 또 다른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작품활동을 하며 일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뉴멕시코에 정착한 아그네스 마틴은 혼자 힘으로 자신이 지낼 벽돌집과 스튜디오를 지었고, 7년간의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 “On a Clear Day”라는 연작을 시작으로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200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그네스 마틴은 뉴멕시코를 떠나지 않았다. 오랜 명상과 기다림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었던 그녀에게 뉴멕시코의 초현실주의적 자연환경은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탐구할 수 있었던 가장 완벽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철저히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했던 그녀가 세상과 소통했던 창구는 오랜 친분이 있었던 페이스 갤러리(Pace Gallery)의 오너 아니 글림셔(Arne Glimcher)였다. 아니는 그녀의 작품을 자신의 뉴욕갤러리에 전시하며 아그네스 마틴과 세상을 잇는 소통창구 역할을 했다.     
 

테이트미술관의 아그네스 마틴 연작- 우정
테이트미술관의 아그네스 마틴 연작- 우정

 

Joy, Innocence, 
love and freedom
남성이 주류를 이루었던 미국 미술계에서 아그네스 마틴은 몇 안되는 여류화가였다. 불교와 동양사상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했던 아그네스 마틴은 전쟁 후 뉴욕 미술계의 주류를 형성했던 추상표현주의를 지향했던 화가였다. 하지만 잭슨 폴락이나 윌렘 드쿠닝의 남성적이고 시끄러운(?) 작품들과 달리, 아그네스 마틴은 초월적인 마음의 눈을 통해 보는 세상의 본질을 캔버스에 담으려 했던 정제된 형태의 작품세계를 펼쳤다. 노자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녀는 균형과 조화를  예술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의 가치로 여겼고, 사물의 겉모습이 아닌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 인식되는 사물의 정수, 본질을 캔버스에 담고자 했다.
아그네스 마틴은 자신의 작품에 기쁨, 순수, 사랑, 자유와 같은 제목을 붙이기도 했는데, 이는 그녀 작품의 중심 주제들일뿐만 아니라 그녀가 인식했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적 요소들이었다. 그녀가 만났던 세상의 가장 안에는 기쁨, 순수, 사랑,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칼빈주의 집안에서 자랐던 아그네스 마틴은 종교가 추구했던 가치나 규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 같다.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의 정제된 작품들을 높이 평가했던 반면 윌렘 드쿠닝의 작품을 그녀는 포르노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고통스러워 할만큼 지독히 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스네스 마틴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나 설명, 평가를 극도로 자제했다고 한다. 그녀는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순수한 감정들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왜 미술작품에 대해선 장황한 설명을 요구하는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이성적 판단을 통한 2차적 경험이 아닌 감성이라는 직접적인 경험, 깨어있음이라는 창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포기하는게 가장 힘들었다고 농담처럼 말했던 그녀는 순수함을 보존하기 위해 이성적 아그네스 마틴을 포기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마치 수도자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비워가듯, 예술적 영감을 위한 자리를 항상 비워두어야만 했던 그녀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비우는 작업은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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