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백마사와 룽먼석굴(龍門石窟)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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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백마사와 룽먼석굴(龍門石窟)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3.1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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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5)
강 건너편에서 본 룽먼석굴 전경
강 건너편에서 본 룽먼석굴 전경

 

어렸을 때『삼국지』를 읽으며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의 활약을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유비와 조조, 관우와 제갈공명 등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이 더 위대하다며 친구들과 다투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 초등학생들은 책보다 훨씬 흥미 있는 게임이나 놀이가 있다 보니 예전만큼『삼국지』를 즐겨 읽지는 않는 것 같다. 대신 게임 삼국지와 만화나 영화 삼국지를 통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을 접한다. 
『삼국지』라고 하면 두 종류의 책이 전한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은 소설『삼국지』이고, 다른 하나는 서진 때 진수(陳壽)가 쓴 역사책인『삼국지』이다. 진수의『삼국지』는 삼국통일을 한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위나라를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촉이나 오나라 보다 위나라에 대한 기록의 분량이 더 많다.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이 진수의『삼국지』가 중요한데, 이 위나라의 역사를 쓴「위서」의 마지막 권인 30권이「동이전」으로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삼국지』의 정식 명칭은『삼국지연의』이다. ‘연의(演義)’라는 말은 ‘사물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뜻으로, 이『삼국지연의』는 진수의『삼국지』등의 역사서를 참고하여 서기 184년 황건적의 난부터 서기 280년까지 중국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역사소설이다. 

중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절인 백마사 입구
중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절인 백마사 입구

 

불교 유적 순례에 웬『삼국지』얘기가 나오느냐고 의아해 하실 수 있다. 왜『삼국지』얘기로 시작했냐 하면『삼국지』의 주요 무대 중 한 곳이 바로 뤄양이기 때문이다. 뤄양은『삼국지』초반의 배경인 후한의 황실이 있는 도시이자 한나라가 망한 후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수도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전쟁의 신으로 모시는『삼국지』에서 가장 폼 나는 영웅 중 한 명인 관우와도 관계가 있는 곳이다. 관우가 오나라 손권의 계략에 사로잡혀 머리가 베이는데, 손권은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의 복수가 두려워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내 책임을 면하려고 했다. 조조는 손권의 술수임을 알고 몸소 상복을 입고 침향나무로 관우의 몸을 만들어 머리와 함께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뤄양에 가면 이 관우의 머리가 묻힌 무덤이 있는 관림에서 관우 사당과 기념관을 둘러보며『삼국지』에서 긴 수염을 날리며 말을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관우를 그려볼 수 있다.
뤄양, 우리 한자 발음으로 낙양이라고 하는 도시는 후한과 위나라뿐만 아니라 하, 상, 주, 전한은 물론 수나라와 오대 때의 후당 등 모두 13왕조의 도읍지였던 곳으로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역사도시이다.『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후한 때부터 위, 진, 당으로 이어지는 500년간은 낙양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백마사 산문 앞에 세워진 백마상
▲백마사 산문 앞에 세워진 백마상

 

김세레나가 불렀던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대가인이 그 누구냐’하는 성주풀이에 등장하는 낙양성이 바로 이 도시 뤄양이다. 낙양의 북쪽에 있는 망산(邙山)에는 한나라 때부터 왕과 귀족들이 죽으면 묻히는 대표적인 공동묘지가 있다. 수당대 등 후대에도 계속 이어져 우리나라에서도 ‘북망산’이라고 하면 죽어서 묻히는 곳으로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망산에는 고묘박물관이 만들어져 있어 무덤의 모습과 무덤에 묻힌 부장품들을 볼 수 있다.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과 비슷한 벽돌로 만들어진 무덤과 무늬가 그려진 전돌도 볼 수 있다. 
백제가 망한 후 의자왕이 끌려 온 곳도 바로 이 뤄양이다. 의자왕은 60대 중반의 연로한 나이에 두 달에 가까운 긴 여정과 나라를 빼앗긴 아픔에 뤄양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 고종은 의자왕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백제 유민으로 하여금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한다. 아들 부여 융과 증손녀의 무덤과 관련된 글을 새긴 묘지명이 남아 있어서 이들의 무덤이 망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망국의 왕으로 이국에서 쓸쓸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의자왕과 그의 자식들이 가졌을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뤄양은 중국 불교에서 기념비적인 곳이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야기로 유명한 후한 명제의 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용인 즉 기원후 67년 명제(明帝, 58-75년)가 금빛이 나는 사람이 서쪽에서 오는 꿈을 꾸고 서방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그들이

▶백마사 안에 있는 금나라 때 세워진 13층 석탑
▶백마사 안에 있는 금나라 때 세워진 13층 석탑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오는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난(竺法蘭) 두 사람을 만나 함께 낙양으로 돌아오자, 명제가 백마사(白馬寺)라는 절을 지어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가지고 온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의 사실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설화에 등장하는 장소인 백마사가 있는 도시가 바로 뤄양이다. 백마사 입구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백마상이 한 필 있는데, 바로 축법난 등이 불경을 싣고 온 백마를 기념하기 위한 상이다. 백마사의 역사는 2000년 가까이 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축된 것이고, 올림픽 때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첨단 시설들을 설치하다 보니 우리나라 산사에서처럼 고즈넉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사실 중국은 인구가 많다 보니 관광지 어느 곳이나 사람들로 붐빈다. 따라서 절이라고 해서 조용한 분위기를 느끼려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조금 북적이는 것을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대불전, 대웅전과 금나라 때 만들었다는 13층의 탑이 볼만하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이 백마사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절이며『사십이장경』이라는 최초의 경전이 번역된 곳이라는 점이다. 그런 역사적인 곳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해질 수 있다.   
뤄양이 중국 불교에서 기념비적인 곳이라고 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뤄양에 룽먼석굴이 있기 때문이다. 494년 북위 효문제는 수도를 윈강석굴이 있는 다퉁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새로운 수도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룽먼에서 조각가들이 질좋은 회색의 석회암을 발견하여 수, 당, 송나라를 거치는 40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굴 2345개를 파고, 거기에 14만여 개의 불상을 새겼다. 주로 북위와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 90% 정도 되는데 불교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까지 엿볼 수 있는 문화의 보물창고이다.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북위 황실에서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펴서 불상의 모습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즉 불상들이 날씬한 신체에 헐렁한 옷을 걸친 남조의 귀족들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다.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거치며 남아있던 서역풍의 모습이 사라지고 중국화된 불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 불적 순례를 계획한다면 윈강과 룽먼석굴을 함께 방문해 두 석굴의 불상을 비교해 보면 더욱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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