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1)
상태바
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5.27 16: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0)
▲(사진1) 감숙성 천수 맥적산석굴 원경
▲(사진1) 감숙성 천수 맥적산석굴 원경

 

삼국지 마지막 부분으로 가면 주인공이었던 유비, 관우, 장비와 조조가 죽어서 긴장감이 조금 떨어진다. 나무도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후에는 낙엽이 지고 나목이 되는 것처럼 인간이나 국가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설에서 전략의 신이었던 제갈량도 항상 이기는 것만은 아니었다. 228년 제갈량은 유비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유선에게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린다. 그리고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한중(漢中)을 나와 먼저 천수(天水), 안정(安定), 남안(南安) 3개 군을 빼앗고 장안으로 진군한다. 이에 다급해진 위나라에서는 사마의를 복직시키고 장합을 보급 요충지

▲(사진2) 맥적산석굴 서벽 잔도
▲(사진2) 맥적산석굴 서벽 잔도

인 가정(街亭)을 공략하라고 보낸다. 제갈량은 중신들이 추천하는 장군들을 제쳐놓고 가정을 방어할 장군으로 마속을 기용한다. 비록 실전 경험이 부족하였지만 마속은 수비하는 데는 넘칠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용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공을 세우고 싶어 적을 끌어들여 역습하려다가 오히려 포위당해 참패하고 만다. 이 때문에 제갈량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돌려 한중으로 퇴각했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끼던 장수 마속의 목을 벤다. 대의를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을 버려야 한다는 유명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유비와 제갈량이 세운 나라 촉은 사천성, 운남성, 감숙성을 아우르는 서쪽 변방에 자리한 나라이다. 제갈량은 출사표를 낸 후 234년까지 7년 동안 무려 6회에 걸쳐 위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마지막 오장원 전투에서 병이 들어 죽고 만다. 이러한 내용의 삼국지연의는 실제 역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인물들에 대한 평가나 묘사에는 과장이 있지만 개별 사건들은 대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내고 처음 공략한 세 곳의 군 중 한 곳이 바로 천수이다.
 천수(天水, 텐수이)는 당나라 때 수도였던 장안, 지금의 서안(西安, 시안)에서 실크로드의 시작점이자 도착점인 돈황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큰 도시 중 하나이다.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에서 돈황까지 이어지는 1천 킬로미터의 긴 회랑 같은 길인 하서주랑(河西走廊)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설령 여정이 빠듯하다고 해도 천수에는 맥적산석굴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바빠도 여정에서 뺄 수 없다. 90년대 초 처음 천수에 갔을 때는 지금처럼 크지도, 인구가 넘쳐나지도 않은 조용한 지방 도시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인구보다 열 배나 늘어 부산보다 40만이 더 많은 380만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도시 가운데로 위수가 흐르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과거에는 산과 물이 잘 어울린 풍광이 좋은 도시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인구가 늘면서 난개발로 인해 과거의 아름다움이 콘크리트로 막혀 답답한 느낌이 든다. 

▲(사진3) 맥적산 121굴나지막한 소리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아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예쁜 보살상이다
▲(사진3) 맥적산 121굴나지막한 소리로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아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예쁜 보살상이다

 

천수가 자랑하는 것은 맥적산석굴 외에 삼황오제 중 복희씨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복희씨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뱀인 인두사신의 모습을 하며, 어로와 농경을 가르쳤고, 팔괘와 문자를 만들어 문명을 시작케 해 고대 전설상의 임금이다. 위수 강변에는 복희묘가 있으며, 정월에는 제사를 올린다. 이 천수를 포함하는 지역은 과거 옹주(雍州), 진주(秦州)로도 불렸으니 주나라의 강태공이 낚시한 곳도 위수였고, 진시황과 삼국지에 등장하는 동탁도 이 지역 출신이다. 또한 이백과 더불어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두보가 한 때 머무르며 시를 지은 곳이어서 시와 연관된 곳에 동상을 만들어 그를 기린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천수를 찾는 이유는 다름 아닌 운강석굴, 용문석굴, 돈황 막고굴과 함께 중국의 4대 석굴로 꼽히는 맥적산석굴을 보기 위해서이다. 대부분 당나라 수도였던 역사도시 서안에서 그리 멀지 않다보니 거기서 차로 오든지 아니면 열차를 이용한다. 맥적산석굴(사진 1)은 천수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45㎞ 정도 떨어진 곳에 땅에서 홀연 불쑥 솟아난 것 같은 바위산에 만들어졌다. 산 모양이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과거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볏짚을 쌓아 올린 낟가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산 이름도 보릿단을 쌓아올렸다는 의미의 보리 맥(麥)자와 쌓을 적(積)를 쓴 맥적산(麥積山, 마이지산)이다. 이 낟가리처럼 생긴 산은 동북쪽으로는 산등성이와 연결되었지만 동쪽에서 남쪽, 서쪽으로 이어지는 곳은 90도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그 높이만도 80미터에 달한다. 이 절벽에 4세기부터 천 년 동안 크고 작은 굴들을 파고 불상을 만들었다. 현재 194개의 굴과 7,200여 체의 불상, 약 1,000제곱미터 넓이의 벽화가 남아있다. 이 수치는 우리나라로 치면 문화재관리국 같은 문물연구소에서 조사한 수치지만 이후 지속적인 조사로 소감과 불상들이 추가되어서 그 수는 좀 더 늘어났다. 깎아지른 절벽에 어떻게 굴을 팠는지 궁금하면 부엌이나 창고에 있는 선반을 생각하면 된다. 절벽에 먼저 구멍을 뚫고 거기에 기둥을 박아 선반처럼 잔도라 불리는 길을 냈고, 그 길을 이용해 굴을 판 것이다.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절벽에 선반을 만들어 굴을 파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 것을 보면 중국인들의 토목기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맥적산석굴의 주요 굴들을 보려면 이 절벽에 만들어진 14층의 잔도를 통해야만 하니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과거에 주차장이 있던 곳에서 크고 작은 사각형 모양의 굴 입구까지 연결된 이 잔도(사진 2)를 보면 인간의 위대한 힘과 상상력에 감동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맥적산에 온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4) 맥적산 133굴 불전도가 새겨진 조상비
▲(사진4) 맥적산 133굴 불전도가 새겨진 조상비

순례, 답사 여행을 할 때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숙성(甘肅省, 간쑤성)에 있는 맥적산석굴, 병령사석굴, 돈황 막고굴은 어느 날 가고 싶으면 배낭을 메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설령 경제적으로 갈 수 있다고 해도 무엇을 하러 가는지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시간 낭비가 되기 쉽다. 그래서 다시 갈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곳은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하고 가서 제대로 보고, 느끼고 와야 한다. 맥적산석굴의 잔도는 일방통행이어서 되돌아 갈 수 없으므로 수많은 굴 중에 꼭 봐야 할 곳이 어디인지 찾아보고 가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2019년 출판된 유홍준 선생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이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고, 사진엽서나 맥적산 입구 상점들에 걸어놓은 사진에 찍힌 장소를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수많은 글과 사진이 있으니 그것들 중 잘 골라내도 나름 알찬 여행 가이드북이 될 수 있다. 
여행지 중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특별히 생각나는 곳들이 있다. 맥적산석굴은 내게 그런 곳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보살상(사진 3)이 있고, 처음 맥적산석굴을 찾은 이유였던 불전도 조상비(사진 4)가 있어서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