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③ - 70퍼센트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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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③ - 70퍼센트의 자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6.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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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지난번 칼럼부터 직함을 ‘시인’에서 ‘자유기고가’로 바꾸었다. 시인이란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상찬의 말이지만 지금 나는 시인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시인이란 ‘시를 사는 사람’을 일컫는데, 지금의 나는 시를 살지는 못하고 단지 ‘시를 쓰는 사람’일 뿐이다. 잠시나마 몸에 맞지 않는 과분한 옷을 입어 불편하고 거북했는데 벗어 버리니, 아쉬운 감이 없진 않지만, 홀가분하다. 
신영복 선생은 『강의』에서 집터보다 집이 크면 그 터의 기가 건물에 눌리고, 사람보다 집이 크면 사람이 집에 눌리고,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며 창조적·예술적 공간이 되는 30퍼센트 정도의 여유를 주장했다. 즉 사람의 능력이 100퍼센트라면 70퍼센트의 자리가 좋다는 것이다. 그 수준을 넘어 버리면 사람이 직업이나 직함을 갖는 게 아니라 직업이나 직함이 사람을 부리게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중심을 집이나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자신에게 둬야 한다는 얘기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끝판왕’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세습 재벌총수들이다. 한국의 세습 재벌총수들은 감옥에 있어도 경영에 별다른 지장이 없거나 오히려 나아지는 공통점이 있다. 이재용만 예로 들어 보자. 이재용은 지난 2017년 2월부터 2018년 2월까지 구속되어 있었는데, 같은 기간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53.6조 원으로 전년도 29.2조 원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고, 주가는 2017년 1월 말 197만 3000원이던 것이 (그 해 10월엔 275만 4000원으로 최고치를 기록했고) 2018년 1월엔 250만 원으로 25퍼센트 넘게 올랐다. 결국 이재용은 삼성전자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없으면 더 나을 수 있는 존재다. 
한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진행자는 방송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마다 자신을 반드시 ‘아나운서 ○○○’라고 소개한다. 한편으로는 자부심의 표현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소 민망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아나운서’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적 빈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나운서’는 더 이상 어릴 적부터 자신이 품었던 꿈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는 명함에 불과하게 된다. 즉 ‘인간 ○○○’는 ‘아나운서 ○○○’ 뒤에 숨어 자신을 상품화시켜 내세우는 꼴일 뿐이다.

우리는 제 자식을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밤늦게까지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돌린다. 2년 전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안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보았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였는데 학교 숙제라기보다는 학원 문제풀이집에 몰두하는 듯했다. 이 아이의 자유시간을 누가, 무엇이 이렇게 빼앗고 있을까. 한참 동안 아이를 바라보니 문득 그로부터 2년 전 추석을 맞아 형네 집에 갔을 때 조카 책상 위에 씌어 있던 문구가 떠올랐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조카는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공부 기계’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달력에 가려져 있는 “(   )→좋은 대학→좋은 직장→(   )”의 비어 있는 곳을 추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좋은 성적)→좋은 대학→좋은 직장→(좋은 삶, 행복)’이 아닐까. 
그 뒤 조카는 이른바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조카가 생각하는 “좋은 직장”이 어떤 직장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는 졸업한 뒤에 노동자로 살 가능성이 높다. 2년 전 버스 안에서 문제풀이를 하던 아이도 앞으로 노동자로 살 가능성이 높다. 이 땅에 사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공기가 있으므로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듯. 마치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 듯. 제 자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자리를 좇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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