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에세이 - 수관기피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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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에세이 - 수관기피의 지혜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0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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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_ 시인
수관 기피 현상은 숲 바닥까지 더 많은 빛이 들어와 식물들은 더 효율적인 광합성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나무가 손상 입을 확률은 줄고, 해충과 질병을 막거나 예방하게 된다. 나만의 물리적, 정서적 공간에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어쩌면 나무들에게도 그런 사생활이 있을지 모른다. 식물들은 매우 정교하고 협력적이며 감정도 가지고 있다. 자연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수관 기피 현상은 숲 바닥까지 더 많은 빛이 들어와 식물들은 더 효율적인 광합성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나무가 손상 입을 확률은 줄고, 해충과 질병을 막거나 예방하게 된다. 나만의 물리적, 정서적 공간에 누구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어쩌면 나무들에게도 그런 사생활이 있을지 모른다. 식물들은 매우 정교하고 협력적이며 감정도 가지고 있다. 자연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7월이다. 녹색의 한라산이 절정기에 이르는 강렬한 생명의 향연이 펼쳐지는 시기다. 제주도가 주는 무한한 가치는 바로 생명력과 그리고 찬연한 햇살과 투명한 공기에 담긴 자연이 주는 행복감이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7월의 찬연한 햇살이 얼굴 가득 쏟아질 때 신선한 행복감에 뿌듯해진다. 
미국의 언론인 ‘리처드 루브’는 현대인을 가리켜 “자연 결핍 장애가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자연 결핍 장애’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명들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이 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자연결핍장애는 의학적 진단명은 아니지만 자연결핍으로 인해 나타나는 여러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규정하고 소통 가능하도록 각성시키는 개념이다. 현대사회에서 자연결핍으로 인해 어린이들이 소아비만, ADHD, 우울증, 감각의 둔화 등의 문제점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에 대한 지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래서 루브는 비타민 N이 부족한 자연 결핍 장애를 극복하고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은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 녹색 공기를 마시며 자연과 재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를 뚫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 찬연한 햇살 자락은 문득 나무들의 ‘수관 기피’의 지혜를 떠올린다. 수관(樹冠)은 나무줄기의 정상, 수많은 가지와 잎들이 모이게 되는 끝부분을 말한다. 숲의 나무가 자라다 가장 높은 꼭대기의 가지가 또 다른 가지를 건드렸을 때 성장을 멈추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식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적외선을 감지해 상대 나뭇가지가 자신과 얼마나 가깝게 위치하는지 파악한 뒤, 그 식물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는 방향으로 자라거나 바람에 흔들려 부딪치는 동안 마모되면서 자연적으로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식물 공동체가 햇빛을 골고루 이용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어려운 숲 환경 속에서 각각의 나무들이 서로 무한생장을 고집하는 대신에 각자의 공간을 적당히 지키며 자람으로써 숲 아래쪽에 있는 키 작은 나무, 작은 풀꽃들까지도 햇볕을 받으며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전세계인들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회적거리두기를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한 번의 유행병이 아니라 2차 대유행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고, 나아가 엔데믹(endemic)이라는 풍토병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심각한 의미로 들린다. 종래의 생활패턴으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면 이제는 어떠한 사회적 삶이 전개될 것인가? 나무가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듯이 우리도 생활 속 접점과 욕망을 줄이고 자신의 내적인 우주를 최대한 확장하며 가능한 한 고독한 생활을 일상적으로 확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그동안 인류는 무한한 욕망의 확장을 극대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편리를 위한 산업화와 도시적 문명을 통해 인간사이의 밀집도가 극대화되었다. 5천년 전에는 전세계 인구가 약 500만 명 정도였는데, 오늘날에는 천만 명을 넘는 도시도 30여개에 달한다. 대도시는 욕망의 집적처였다. 서울 강남의 노른자위 땅 한 평 가격이 1억3천만 원을 넘는다. 
우리는 그동안 물질적 욕망의 용광로에서 세상의 흐름대로 달려가던 삶을 당연시했다. 이제 인류는 그 욕망을 멈추어야 만 할 시기를 맞고 있다. 아니 이제는 그동안의 욕망과는 반대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역류도(逆流道)의 삶을 모토로 삼아왔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고 난 다음 사함빠띠 브라흐마에게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라고 말했다. 탐욕에 불붙어 보지 못한 세상의 흐름은 이제 부메랑이 되어 인류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역류이다.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대로 산다는 것은 욕망대로 사는 것이다. 즐기는 삶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로 귀결된다.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삶이다.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욕망을 거스르는 삶이다. 부처님을 따르는 청정한 삶에는 고통과 눈물이 따른다.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세상 사람들과 반대로 탐.진.치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불교는 욕계를 벗어나고자 수행하는 사람들의 종교이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야하는 현실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삶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진리대로 살다보니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살게 되고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욕망을 부추긴다. 그런데 그 욕망의 접점에서 등장한 코로나가 가져온 새로운 질서는 우리에게 그 욕망을 잠시 멈추라는 경고로 들린다. 상대를 잠식하던 그 욕망의 질서, 남을 짓밟고 무한 경쟁의 우위에 올라서려는 이념과 국가이익과 전쟁과, 다른 생명 종을 인간의 이기적 관점으로 점령하고 훼손한 과보가 멀지 않았다는 신호음이 아닌가? 
수관기피처럼,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제는 욕망의 거리두기가 되어야 함을 깨닫는 반면교사로 해석해 보는 것도 불자로서 당연한 단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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