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무암법당이 아름다운 대정 서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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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암법당이 아름다운 대정 서산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0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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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4]
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서산사는 오래된 절이 아니며 산속에 있지도 않다.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3159번지에 있고 대웅전 앞으로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다. 1943년 항일운동가 강창규 스님이 문말백 보살과 함께 창건한 사찰이다. 현재의 서산사보다는 약간 북쪽이었다. 건축물 등기등본에는 1932년 완공된 것으로 기록돼 있어 그 이전부터 사찰의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창건주 강창규 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제주불교와 제주항일 역사 등 제주 근대사를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다. 스님은 오등동에서 태어났으나 사계리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본적은 안덕면 사계리로 되어 있다. 완주 위봉사에서 출가하였으며 1914년경 법정사로 옮겼다.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선봉대장으로 거사 당일 현장 지휘자였다. ‘10월 8일 제주 성안을 공격하여 관리를 체포하고 일본인을 추방하되 이 명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군법에 처한다’는 격문을 돌렸는데 이 격문을 강창규가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거사 이후 4년 3개월여를 은신하였다가 1922년 12월 28일에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8년형을 언도받고 5년 11개월 8일 동안 복역하였다. 동생 강수오는 강창규 스님과 함께 법정사 항일투쟁에 동참하였다가 투옥되어 재판 전에 옥사하였다. 
강창규 스님은 출옥 이후 전라북도 임실군 죽림사에서 활동하다가 제주도로 돌아와 1943년 6월 7일 제주도 대정면 동일리에 서산사를 창건하였다. 1958년 6월 18일에는 이단명심 보살, 그리고 당시 주지였던 박용봉 스님 등과 협의하여 인근 보청사와 법상사, 그리고 서산사를 통합하여 성불사로 바꾸었다. 박용봉 스님은 성불사를 인수한 후 법당과 요사를 증축하는 등 중창불사(重創佛事)를 단행하였고, 1962년 10월 13일에는 대한불교조계종에 사찰을 등록하였다. 현재 제23교구 본사 관음사 소속이다.
강창규 스님은 1963년에 동일리 3161번지 서산사 서쪽 바위 위 비석이 세워져 있는 자리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자세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스님을 기리는 비문의 내용은 “불기 2512년 2월 22일 故姜昌奎和尙碑(고 강창규 화상비) 성주사 주지 안성원 스님”이라고 새겨져 있다.

향토사학자 고영철
향토사학자 고영철

성불사는 1966년에도 대대적 중창불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때의 재건기념비가 당시 서산사 도량 내에 세워져 있다. 성불사는 이후 다시 서산사로 절 이름을 고쳤으며, 1968년 성원 스님이 석조건물로 법당을 중건했는데 현재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성빈 스님은 지난 1975년 8월 후불·지장·신중탱화를 조성하고 1979년에는 개금불사를 봉행했다. 1993년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과 협시불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모셨고, 왼쪽 상단에는 목조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제주도 유형 문화재 20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재이다. 
2003년 8월 복장물에서 조성연대와 시주자 등이 적힌 발원문 7장과 주문 1장이 발견되어 내용을 확인한 결과 이 목조보살좌상은 1534년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목조보살좌상의 발원문에 따르면 조성 당시 전라도 관찰사 남세웅, 나주 목사 봉사종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전라도 나주 지역에서 조성된 후 제주도로 이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1966년 조성된 서산사 법당은 제주 특유의 현무암으로 쌓아올려 이색적이고 소박하게 외형을 고스란히 보존하면서 그 위에 기와를 올려 중건했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보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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