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5] "고릉사 터(古陵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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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5] "고릉사 터(古陵寺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0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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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는 애월읍 고내리 일주도로에서 하가리로 들어가는 길 주변을 고내리 절터라고 하여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 추정해 볼 때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시대 사이에 창건된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물론 절 이름이나 규모 등은 밝혀진 것이 없고 기와편과 도자기편들이 발견된 점과 절골, 절터왓, 절왓 등의 지명을 근거로 한 설명이다.
사실 이 일대는 1994년 우회도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탐라시대의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었으며 여기서 나온 토기들은 고내리식 토기로 명명될 정도로 유명한 지역이다. 탐라시대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었고 고려시대에도 큰 마을을 이루고 있던 지역이니 절이 지어진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고릉사 터는 고려시대의 절과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고내봉 북동쪽 중간쯤 위치에 골체(삼태기의 제주어) 모양으로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수중화산폭발로 이루어진 사구층이 융기한 후 그 위에서 다시 화산이 폭발하여 고내봉이 되고 화산쇄설물퇴적층이 굳어져가는 과정에서 해식단애와 짧은 암굴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인가와 격리되어 있고 경치가 뛰어나니 이곳에 절에 딸린 수행암을 지었을 것이다. 그랬던 곳에 1930년 고내리 사람 선두석(宣斗石)이란 분이 이곳에 고릉사(古陵寺)라는 절을 창건하였으나 1948년 4·3사건 당시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절집은 없어졌지만 지름 30㎝ 정도 되는 현무암 주춧돌 8개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다른 주춧돌 하나는 100여m 아래로 이동되어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6칸(길이 25m 정도) 측면 3칸(길이 10m 정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깨어진 기와 조각들도 널려 있는 것으로 보면 고릉사는 기와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뒤편은 경사면을 깎아서 수직 벽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아래쪽에는 경사면을 평지로 보완하기 위한 축대가 정교하게 축조되어 있다. 석재는 주변에 있는 화산쇄설물퇴적암을 납작한 직육면체 모양으로 가공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지어진 건물에 석재를 정교하게 다듬었고 시멘트 조각도 있는 것을 보면 신도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토사학자 고영철
향토사학자 고영철

건물 터의 바로 아래로는 2칸으로 구성된 9단의 계단과 7단의 계단이 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계단의 석재는 역시 화산쇄설물퇴적암이다. 그 아래로는 1칸으로 된 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계단을 따라 정면에는 고내리와 구엄리의 바다가 펼쳐진다. 날씨가 좋을 때는 멀리 추자도까지 보이는 위치이다. 지금은 건물 터 옆에 뽕나무가 너무 크게 자라서 전체를 조망하기 어렵다.
건물 터에는 현대에 만들어진 고릉유사 안내판과 우산 모양의 정자가 만들어져 있다. 안내판에는〈옛 고승들의 수도처로 알려져 있으며, 문사(文士)와 한량(閑良)들이 계절에 따라 이곳에 모여 풍류(風流)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하여 고릉유사(古陵遊寺)라 칭하였다. (중략) 우리도 이곳에서 옛 고승이 되어 잠시 쉬어감이 어떠한가?〉라는 글이 있다. 고내리의 8경 중 제2경으로 선정된 곳이다.
김대규 화백의 이 그림에는 지금은 없지만 옛날 고릉사 대웅전과 요사채를 그려 넣어 아쉬움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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