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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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22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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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4)
(사진 1) 169굴 북벽 무량수불감의 묵서
(사진 1) 169굴 북벽 무량수불감의 묵서

실크로드의 중국 종점인 장안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천수와 난주는 교통의 요지로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육로를 통해 인도로 불경을 가지러 갔던 많은 승려들도 대부분 병령사석굴이 있는 난주를 거쳐 갔다.『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의 모델이 된 당나라 때 현장(玄奘, 629~645년 사이에 인도를 순례) 스님 역시 난주를 거쳐 갔다. 현장 스님 이외에도 수많은 승려들이 불경을 구하거나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직접 보기 위해 또는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동아시아의 구법승과 인도의 불교 유적』(책임 편집 이주형)에 따르면, 3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인도로 간 동아시아의 구법승 중『고승전』등에 이름이 전하는 승려가 170여 명,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도 7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름이 전하는 170여 명 중에는 현장, 법현(法顯, 399~413년 순례), 의정(義淨, 671~695년 순례) 등 중국 승려들이 대부분이지만『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 승 혜초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 승려들과 일본 승려도 있었다. 의정이 쓴『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나온 구법승들을 분석해 보면 인도로 간 구법승들 중 불과 10%만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실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험난한 행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2) 법현공양지상(좌)과 도총지상(우)
(사진 2) 법현공양지상(좌)과 도총지상(우)

인도로 갔다 돌아온 구법승들 중 자신이 중국으로 돌아와 순례기를 남긴 승려로 현장 외에 법현, 의정과 신라의 혜초(慧超, 722~727년 순례)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기록이 있기에 그나마 당시 중국과 중앙아시아 및 인도의 불교와 불교 유적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인도를 다녀 온 선구자는 바로 법현 스님이다. 법현은 육로로 다녀 온 현장과 달리 육로로 갔다가 바닷길로 돌아왔으며, 의정은 바닷길로 왕복했고, 혜초는 바다로 갔다가 육로로 돌아왔다. 고구려의 승려가 바닷길로 가다가 풍토병에 걸려 돌아가시자 도중에 있는 섬에 묻었다는 기록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바닷길이라고 더 쉬운 것은 아니었다. 법현의 순례기인『불국기』에 보면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에서 중국 광주까지 평소 50여 일이 걸리는데, 폭풍우를 만나 도중에 배를 수리하기도 해서 평소보다 40일이 더 걸렸다고 한다. 수십 일이 더 걸렸어도 육로보다는 훨씬 빠른 여정이었다. 
현장보다 230년 전에 인도를 향해 떠난 법현은 산시성(山西省) 출신으로 속세의 성은 공(龔)씨이다. 그의 형들이 어려서 죽자 아버지가 그를 세 살에 절에 들여보냈고,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불경을 읽고 공부하였으나 당시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이 적었고 계율(戒律)에는 착오와 누락이 많았다. 그래서 법현은 인도로 가서 제대로 된 율장을 구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다가 60세를 넘은 399년에 마침내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혜경(慧景), 혜응(慧應), 혜외(慧嵬), 도정(道整) 스님과 함께 인도를 향해 장안을 출발하였다.

(사진 3) 인도풍의 반복된 옷주름이 표현된 얇은 옷을 입은 불 보살상
(사진 3) 인도풍의 반복된 옷주름이 표현된 얇은 옷을 입은 불 보살상

요즘에도 60세에 힘든 여행을 하다는 게 부담스러운데 1700여 년 전, 제대로 된 보호 장비도 없이 오직 불경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위대한 출발을 한 것이다. 장안을 출발한 법현 일행은 걸복건귀(乞伏乾歸)의 도읍인 건귀국(乾歸國, 난주)에 이르러 3개월간 하안거에 들어갔다. 그 후 서녕(西寧)을 경유하여 장액(張掖)으로 가 거기서 다시 다섯 명이 합류하였고, 우전국에서 한 명이 더 합류하여 모두 11명이 인도로 향했지만, 목적을 완수한 것은 법현 한 사람뿐이었다. 
법현이 난주에서 머물렀다 하니 당시 병령사석굴이 조성되어 있었다면 들렸을 만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 병령사석굴이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까지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석굴은 169굴로, 무량수불감이라 불리는 감 옆에 서진(西秦, 385-431) 문소왕인 걸복치반(乞伏熾盤, 412~428)의 연호인 건홍원년(建弘元年, 420년)에 먹으로 쓴 글씨(사진1)가 남아 있다. 이 상황을 바탕으로 유추하면 병령사 169굴은 법현이 난주에 머물던 때보다 20여 년 뒤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병령사석굴을 보았을 가능성은 적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령사 169굴에는 법현의 이름이 적혀 있다. 169굴 북벽 한 면에 공양인들이 그려졌고 그 중 승려 모습의 공양인 옆에 ‘법현공양지상(法顯供養之像)’과 ‘도총지상(道聰之像)’(사진2)이라 적혔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서 법현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420년이 법현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온 이후이니 그가 돌아왔다는 놀라운 소식이 난주에도 전해졌을 것이고, 인도로 가는 도중에 그가 난주에 머물렀던 인연을 기려서 그의 이름을 쓴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옆에 쓰인 도총은 난주의 고승이거나 함께 장안을 출발하고 인도에서 헤어진 도정(道整)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4) 갈비뼈가 표현된 석가모니 고행상
(사진 4) 갈비뼈가 표현된 석가모니 고행상

169굴이 적어도 일부는 420년에 조성되었으니 중국 석굴 중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 중 하나이다. 따라서 일부 불상과 보살상은 인도와 서역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어 몸매가 늘씬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반복되는 옷주름이 표현된 얇은 옷이 몸에 짝 달라붙어 몸의 굴곡이 밖으로 드러나는 불상(사진3)도 여럿 보인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기후가 따스한 인도 불상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중국 석굴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앙상한 갈비뼈가 들어난 석가모니불의 고행상(사진4)도 만들어졌다. 이들은 인도와 서역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한편『묘법연화경』「견보탑품」에 나오는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이 나란히 앉은 이불병좌상도 만들어졌고『유마경』에 주인공 유마힐의 모습도 벽화로 그려져 있다. 이들 두 경전이 5세기 초에 장안에 들어온 구마라집에 의해 번역된 것이므로, 장안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병령사에 가면 169굴은 반드시 보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후배는 도저히 못 가겠다고 해서 대신 사진을 열심히 찍어 전해주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고 두고두고 후회했다. 무섭더라도 마음 단단히 먹고 올라가 볼 만하다. 

(사진 5) 169굴 벽화 일부 - 하단의 불좌상의 오른쪽에 유마힐이라는 묵서가 있다.
(사진 5) 169굴 벽화 일부 - 하단의 불좌상의 오른쪽에 유마힐이라는 묵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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