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참법 수행과 교화로, 조선불교 중흥 힘쓴 행호(行乎)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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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참법 수행과 교화로, 조선불교 중흥 힘쓴 행호(行乎) 대선사
  • 정리: 안종국 기자
  • 승인 2020.07.2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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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순교승 열전[2]
법문 들으려 구름인파 몰리고 출가 줄잇자 유생들 상소로 대역죄인에 몰려 제주도 유배와서 입적

행호선사는 출생 시기가 미상이며, 해동공자로 칭송되던 고려 초기의 명신 최충(崔沖)의 후손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계를 철저히 지켰으며 묘법(妙法)을 깨달아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시를 잘 썼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살아계실 때 성심으로 봉양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장례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기록에 남아있는 행적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태종 17년(1417)의 일이다. 그해 가을 태종은 원주 치악산에 있던 각림사(覺林寺)의 중창 불사가 끝나자 낙성법회로서〈법화경〉설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행호선사의 명성을 듣고 그를 설법주로서 초빙하였다. 다음해에 태종은 경기도 고양의 장령산(長領山)에 있는 성녕대군(誠寧大君)의 묘 남쪽에 대자사(大慈寺)를 짓고 행호선사에게 주지를 맡도록 하였다. 대자사는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한 사찰이다. 그 당시 대자사는 120명 승려가 거주하고 행사 때는 2000명 승려가 함께 하던 왕립사찰이었다. 세조 때는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도 주석하였다.
1418년 8월에 세종이 등극하자 행호선사를 특별히 신임하여 그를 천태종의 종무를 총괄하는 판천태종사(判天台宗師)로 삼았다. 이 무렵 그의 법계는 도대선사(都大禪師)였는데, 선종의 법계는 대선사가 가장 높지만 판사(判事)를 맡게 되면 도대선사라 불렀다. 하지만 행호선사는 판사의 직분을 오래지 않아 버리고 다시 먼 남쪽으로 운수의 길을 떠났다.
행호선사는 지리산 부근의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전란과 억불정책으로 쇠락해진 사찰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경남 함양군 마천읍의 지리산 자락 안국사(安國寺)도 이 무렵 행호선사가 중창한 절이다. 절이 낙성된 뒤 행호선사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듯 그의 초상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오늘날 은광대화상(隱光大和尙) 부도가 남아 있는데 이것이 행호선사의 사리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행호선사는 또한 안국사의 부속 암자인 금대암(金臺庵)도 다시 세워 수행처로 삼았고, 전남 장흥군 관산면 천관산(天冠山) 수정사(修淨寺)도 창건하여 초암을 엮어 한동안 머물면서 수행했다.
행호선사가 행한 중창 불사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은 만덕산 백련사(白蓮寺)다. 백련사는 고려 시대 천태종 고승 요세(了世)가 옛 절터에 새롭게 큰 가람을 세우고 참회와 정토행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이끌어 가던 사찰이다. 이후 여덟 명의 국사를 배출하며 천태종 대중불교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으나 왜적의 침입을 겪고 시대가 바뀌면서 완전히 황폐해진 상황이었다.

행호선사 사리탑으로 추정하는 안국사 사리탑
행호선사 사리탑으로 추정하는 안국사 사리탑

 

지리산에 머물고 있다가 백련사에 가서 이러한 모습을 본 행호는 깊이 탄식하며 중창 불사를 서원하여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도움으로 세종 12년(1430)에 시작되어 7년 만에 완공을 보았다. 행호선사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며 예전과 같이 독경과 법화참법을 행하고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수행을 이끌었다. 이후에는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가 안국사에 머물며 수행과 교화에 힘썼다.
세종 20년(1438)에 왕이 행호선사를 한양으로 불러 올려 흥천사(興天寺)의 주지를 맡게 하였다. 흥천사는 본래 태조가 제2비(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묘인 정릉(貞陵) 동쪽에 원찰(願刹)로서 건립한 170여 간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세종 6년에 예조(禮曹)의 건의에 따라 천태종은 조계종ㆍ총남종(摠南宗)과 함께 선종(禪宗)으로, 화엄종ㆍ자은종(慈恩宗)ㆍ중신종(中神宗)ㆍ시흥종(始興宗)의 네 종파는 교종(敎宗)으로 통폐합되었다. 이 때 흥천사가 선종의 총본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세종은 즉위 19년에 이 절을 크게 중수하고 행호선사를 판선종사(判禪宗師)로 임명하여 주석하게 한 것이다.
산중에 있던 행호선사가 선종의 영수(領袖)가 되어 한양에 올라가게 된 것은 세종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효령대군의 간청이 크게 작용하였다. 태종의 둘째 아들로서 세종의 친형인 효령대군은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어 많은 불사에 동참하였다. 
행호선사는 흥천사에 머무는 기간 동안 많은 승속들을 이끌었다. 안거를 실시하면서 <법화경>을 설하니 법문을 들으러 오고 재물을 보시하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행호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하는 이들도 매우 많았다. 일반 백성은 물론 왕가의 종친과 귀족들이 모두 제자의 예를 행하면서 지극하게 받들었고 고려 말의 고승 나옹(懶翁)화상과 비견될 인물이라고 일컬어졌다.
행호선사가 중앙에서 불법을 크게 펴니 결국 유가 쪽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세종이 흥천사를 크게 중건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터에 사교(邪敎)로 여긴 불가의 승려에게 구름처럼 대중들이 모여들자 성균관 유생 이영산 등 648명이 집단으로 상소하였다. 세종 21년(1439)에 연서하여 올린 상소는 이렇다.

“신들이 듣건 데 전조의 말기에 승려 나옹이 허무적멸의 가르침으로 어리석은 무리들을 유혹했습니다. 이제 다시 승려 행호가 흥천사에 머물면서 나옹의 도반이라고 하면서 백성을 속여서 풍속을 바꾸려고 합니다. 백성들이 사모하기를 나옹과 다름없이 합니다. 행호로부터 받은 도첩이 한 해 동안 수 만 명에 이르렀으니 이는 인류가 멸망할 조짐입니다. 전조의 쇠퇴한 말기에도 나옹을 목 베어 죽여서 요사한 무리를 없앴거늘 하물며 성세에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영을 내려 승려 행호의 머리를 끊어 요사하고 망령된 근본을 영구히 없애면 국가에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행호선사가 중창불사를 완수하고 천태종 부흥에 힘썼던 만덕산 백련사
행호선사가 중창불사를 완수하고 천태종 부흥에 힘썼던 만덕산 백련사

 

성균관 유생들이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태업을 하자 세종은 주모자인 정극인(丁克仁)을 유배 보내기까지 하였다. 행호선사를 하산토록 하면 효령대군의 병이 재발할까 우려하던 세종은 결국 대신들의 거듭된 주청에 따라 상소한 사흘 뒤 행호선사를 경기도 고양에 있는 대자암에 머물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처사로도 유생들의 반감을 잠재울 수 없었다. 마침내 20여일 만에 행호가 본래 머물던 지리산으로 돌아가도록 하였고, 그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단편적인 기록에 의하면 행호선사는 세종28년 (1446년) 제주 유배길에 올랐고, 세종 29년에  제주도에서 결국 대역죄인의 몸이 되어 유생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정극인의 문집인〈불우헌집(不憂軒集)〉에 행호가 자석을 숨겨 놓고 금불상을 공중에 뜨게 하였다가 주상에게 발각되었다거나, 귀양 갈 때 태인(泰仁)을 지나다가 정극인이 사는 집 앞을 흐르는 냇물을 원수의 물이라며 마시지 않았다는 등 악의적인 글이 있는데 당시 유생들이 그를 얼마나 싫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생몰연대가 미상이라 정확히 언제 어떻게 입적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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