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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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8.1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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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일체유심조’의 다섯 글자는 불자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화엄경의 사구게四句偈이다. 
세존께서 열반하신지 2600여 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선지식들이 제법무아諸法無我와 공空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유심唯心과의 관계를 쉽고 바르게 설명한 책을 찾지 못해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선우를 만나 초기불전연구원에서 펴낸 초기 경과 논장을 소개받아 열심히 공부한 결과, 마음은 조건 발생적이고 동적動的인 것으로 이해하게 됐다. 현대 심리학에서도 마음의 역동적 성질을 수용하고 영혼이라는 개념을 마침내 버림으로써 불교 심리학을 신주 모시듯 한다. 
마음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르는 게 ‘마음’이다. “모든 것(담마, dhamma)은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은 가장 중요하고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라는 게송은 「법구경」의 첫 구절이다. 이 교설은 법들은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지, 무無로부터 무언가를 만든다는 조물주가 아니라는 말이다.
세존께서 「세상의 경」(S1:70)에서 말씀하시길, “여섯(六處, 六根, 六識)으로 세상이 생겨났고 여섯으로 친교가 이루어진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세계는 내 의식 또는 인식 안에 있다(The world exist in my consciousness)’라는 의미이다. 이를 중국 불교는 ‘一切唯心造’로 표현한다.
마음은 유위법으로 찰나적 존재이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며 흘러가는 그 마음, 식識의 세계로부터 해탈하기 위한, 다이아몬드마저 절단할 수 있을 정도의 지혜를 세존께서 깨닫고 그 길을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경전이나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은 형이상학적이다. “마음은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 있지도 않다. 과거심도 현재심도 미래심도 없다. 길지도 짧지도 모나지도 둥글지도 않다.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없다. 만져지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찾으면 얻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모든 세계와 국토를 만드나 그렇다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모든 생각, 분별, 말과 글에서 떠나있으나, 그렇다고 이런 마음 작용들과 분리된 별개의 자성을 갖는다고 할 수도 없다.”라고 하면서 이를 절대적 실재(진여심, 불성)라고 이름 짓고 있다. 
마음을 이렇게 묘사하면 마음은 고정된 어떤 하나의 실체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마음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건에 따라 동요한다. 마음은 선善·불선不善의 작용이 오고가는 광장일 뿐이다. 아라한과 같은 성자들에게도 마음은 있지만 업을 짓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눈으로 형색을 봄에 … 귀로 소리를 들음에 … 코로 냄새를 맡음에 … 혀로 맛을 봄에 … 몸으로 감촉을 느낌에 … 마노[意]로 법을 지각함에 있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지 아니할 때, 탐욕과 성냄 등의 나쁘고 해로운 법들이 생겨나 몸과 마음으로 고통을 겪는다. 그 반면에 이런 여섯 가지의 감각기능이 잘 제어될 때 행복한 삶을 산다.
서양 신학이나 유물론에서 등한시해 온 ‘마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하여 서구의 현대 심리학이나 뇌 과학은 불교심리학 공부에 천착하고 있다. 과학적 증명을 통해 도력이 높은 티베트 승려가 깊은 명상 속에서 놀랄 만큼 강력하고 침투력이 강한 감마 뇌파를 발생시켜 마음의 광범위한 영역을 통합하고 하나로 묶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뇌가 모든 것을 운영하고 마음을 만들어낸다는 제왕적 시스템이라는 고정관념을 폐기했다. 
  뇌에 마음을 주자(mind your brain). 명상하는 마음이 ‘머릿속의 뇌’를 바꿀 수 있다. 뇌가 사무량심을 특정 방향으로 끌어당겨서 자동항법 장치에 들어갈 때 이 사바세계를 떠날 수 있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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