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려관스님 탄신 155주년기념 제6회 신행수기 가작 "바람이 멈추니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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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려관스님 탄신 155주년기념 제6회 신행수기 가작 "바람이 멈추니 보이는 것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8.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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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현

 

“간절한 기도 후에도 이루어지지 않거든 저 불상을 부숴버리세요. 괜찮으니까.” 법당 문 나서며 일 배 나눈 스님과의 단호한 짧은 대화, 그것은 큰 울림이고 거스르기 힘든 강한 위압처럼 다가왔다.
푸름이 짙어지는 늦여름의 경내는 온통 초록이다. 그 초록은 햇살을 업어 옅고 짙음, 밝고 어둡게 녹음의 명암은 계절의 행간으로 흘러 싱그럽기 그지없다. 그걸 손에 꼭 쥐면 푸른색 물이 똑똑 떨어질 것 같이 바라보는 곳곳 초록이 낭창거린다. 이런 고운 신록도 20년 세월의 간극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내 감정선을 건드리며 온전히 보고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들어섰던 그날도 아마 산사는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 걸음 따라 오갔던 곳이다. 고즈넉한 분위기, 스님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면 뭔가 불경함으로 보일 것 같아 훔치듯 뵌 스님에 대한 경외감, 대웅전 옆 낮은 아치형 연못엔 연꽃 사이를 유유자적 유영하는 금붕어의 한가로운 일상, 색색이 바위틈에 제 멋 겨워 핀 꽃, 잘 손질된 경내 잔디밭은 낙엽 하나 없는 정갈함이다. 
바람의 흔적 따라 처마에 걸린 풍경엔 맑고 고운 금속성 소리도 매달려 있다. 이런 고운 것들은 그때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난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을 끌어안느라 마음만 분주하다.
젊은 날, 남편은 모진 병마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올곧아 반듯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따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한테 이런 가혹함이라니…. 이해는 물론,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맘이었을까.    통증이 심해갈수록 그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발악하면서도 그때마다 두려웠다. 많이 두려웠다. 병이 깊어가자 끝내 생각은 제풀에 맥없이 꺾이며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용서해 달라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무엇이든 다 하겠으니 살려만 달라 간청을 하다가 이내 읍소를 거듭했다. 
법당 부처님 앞에 엎드려 낮춘 자세에선 나도 모르게 밟았던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에도 잘못을 빌고 또 빌었다. 머리 조아려 기도하는 날들도 통증의 깊이에 비례하며 점점 깊어만 갔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한없이 낮추어 빌면 신은 인간이 짊어진 고통의 크기를 정말 알까. 또 인간에게 신이 미칠 수 있는 힘의 영역은 어느 만큼일까. 신하고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나 고난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능력에 매달려 의지하는 것이 맞나보다.
그 즈음 다니던 서울 S대 병원에서조차,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며 ‘달리 방법이 없다’는 짧은 말만 담당의는 담담한 어조로 건넸고, 소리 없는 긴 울음 뒤, 참다 뱉어낸 ‘꺼억’하는 목울대의 움직임만이 대답을 대신했었다. 집으로 돌아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말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찾은 절에서 스님과의 인연이 깊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마디에 둔탁한 뭔가에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멍했다. 
중2와 초5년 두 아들의 일상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온 신경은 오롯이 살려야, 살려내야 된다는 일념으로 다른 생각들이 비집을 틈이 없었다. 매일매일 병원을 오가며, 약을 달이면서도, 점점 야위어 피골이 상접한 다리와 어깨를 주무를 때도, 미음을 떠 입에 넣어주면서도, 얼굴과 손을 닦으면서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도와달라고 비는 동안 마음은 어느새 부처님께 의지하며 삼천 배로 몸과 마음을 한없이 낮추는 날이 잦았다. 심신의 피로에 두 다리는 떨리고 몸이 휘청거렸다. 마치 몸을 낮추는 각도와 절의 횟수에 비례하여 부처님과 가까워질 것 같은 생각에 한층 더 낮추었다. 
이듬해 아픈 사람도, 주변 사람도 모두 지쳐갈 무렵 남편은 마지막 삼킨 들숨에, 날숨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도, 돈도 허망하게 다 잃고 난 뒤의 삶은 가눌 수 없는 상흔만 남은 채 긴 시간을 또 펄럭였다. 49재를 모시고 돌아오며 상실로 의한 상흔은 왜 그리도 무겁고 가누기 힘들던지 스님께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왔다.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것은 없었다. 그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막막함 속에서 스님께 고마운 마음도 편안히 전하지 못한 채, 다시 속절없는 시간만 베어 먹고 있었다. 몇 년 후, 사람이 살면서 기본적인 도리라는 책무를 유기한 것 같은 죄스러움에 더 늦기 전에 스님을 찾아뵈었다. 우리말에 ‘인정을 베풀려 해도 곳간에 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음만 내밀기엔 죄송하고, 염치없어 민망하고, 사람값 못하는 것 같은 자괴감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빈 입으로 빈 말만 건네야 했던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하던지…. 그런 마음을 헤아리신 걸까. 스님께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해 주셨다.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간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생과 맞바꿔도 좋으니 살려달라는 애원도 모자람이었을까. 마음을 추슬러 가던 어느 날, 퍼뜩 20년 세월을 거스르며 스님께서 하신 ‘간절한 기도 후에도 이루어지지 않거든 저 불상을 부숴버리세요. 괜찮으니까.’ 그 말씀을 곱씹어 보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처럼,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 부처님의 뜻을 기다리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힘들고 지쳐 느슨할 수 있는 마음을 다잡아, 소홀함 없이 매진하여 남은 삶,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에게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라는 깊은 가르침이었다. 그걸 아주 늦게야 헤아린 이 미련함이라니.
몇 해 전 초파일 며칠 앞둔 날, 더 늦기 전에 스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일을 다녀 이렇다 하게 도울 수는 없지만 혹시 손이 필요하면 뭔가 돕겠다고 말씀드리니 초파일 등 접수를 도와 달라고 하셨다. 다음날 서둘러 퇴근하며 절로 향했다. 찾아오는 신도들의 등을 일일이 마음모아 접수했다. 
새벽녘이 되자 많은 신도님들이 부처님오신 날 등을 밝히기 위해 걸음 하셨다. 짧은 시간 하도 많은 글을 써, 펜을 잡은 중지 첫마디 피부가 밀려나고, 밤샘하느라 쏟아지던 피로 등… 그래도 스님께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꽃이 제 향기를 품기도 전에 사라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삶에 비해, 부처님 법에 대해서 기본적인 교리도 배우기도 전에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사람이 타인에게 미칠 수 있는 자비의 크기가 있다면 어느 만큼일까? 스님에 대한 고마움이 절대적 믿음의 단초가 되어 부처님께 의지하는 삶을 잇겠노라 다짐해 본다.
올해는 코로나 19로 4월 초파일 행사 등 접수가 한 달 미루어졌다. 부처님 전에 올릴 제물을 마련할 돈을 만지고, 간절한 기도의 주체와 기도문을 쓰는 일이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바탕에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으면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 된다. 마음바탕에 믿음이 견고하게 쌓이지 않으면 하찮아 보이나, 그것은 서로에게 다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 삶을 온통 휘두르며 큰 획을 긋던 모진 바람이 멈추니 안보이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부처님과 가장 가까이 계시고, 무엇보다 존경하는 스님께서 받들어 모시는 부처님이시다. 분명히 믿고 부처님께 의지하노라면 내 삶속 지혜의 등을 밝혀 주시는 날도 함께하리라 굳게 믿는다.
가장 힘겨운 시간 앞에서 큰 힘으로 부처님께 의지하도록 이끌어주신 도남 보덕사 혜전 주지스님께 이 지면을 빌어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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