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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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8.1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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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5)
(사진 1) 병령사 제3굴 중앙의 탑
(사진 1) 병령사 제3굴 중앙의 탑

 

중국 불적 순례에서 가장 비중이 큰 곳이 석굴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운강, 용문, 맥적산, 돈황, 천룡산, 공현, 병령사석굴 외에도 교통 요지에 굴을 팔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대개 석굴을 조성해 불상을 안치하였다. 평지에 만들어진 절은 사람들이 접근하기는 좋지만 화재나 전란으로 소실될 가능성이 많고 꾸준히 보수해야 한다. 석굴도 보수는 해야 하지만 재료가 목조인 평지 사찰에 비해 노력이나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이러한 점도 곳곳에 석굴을 조성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사진 2) 병령사 제3굴 남벽 감실 내 당나라 때 만든 불좌상
(사진 2) 병령사 제3굴 남벽 감실 내 당나라 때 만든 불좌상

 

중국의 석굴들은 실크로드의 거점인 감숙성 돈황과 돈황에서 장안까지 이어지는 하서주랑의 주요 도시 주변에서 4세기부터 만들어졌다. 물론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름이 무덥고 비가 많은 인도에서는 불교뿐만 아니라 자이나교나 힌두교에서도 석굴을 파서 수행처로 삼았다. 유명한 아잔타와 엘로라에 있는 불교 석굴은 승려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비하라(승원굴 또는 승방굴)와 예불 공간인 차이티야(탑묘굴 또는 사당)로 구성된다.

(사진 3) 병령사 제3굴 명나라 때 그린 불전설화도
(사진 3) 병령사 제3굴 명나라 때 그린 불전설화도

 

인도의 차이티야를 중국에서 탑묘굴이라 번역한 이유는 차이티아에 불상 대신 스투파라 부르는 사리탑이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도에는 진위 여부를 가리지 않더라도 석가모니의 사리가 존재했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신한 불상보다 사리탑 예배가 더 의미 있었다. 중국에서 석굴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4세기 무렵은 불교가 전래된지 꽤 되었고 불상 제작은 물론 대승불교의 다양한 경전이 번역되기 시작한 때이다. 그런데 중국은 인도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과 관련된 장소가 있지도 않았고, 부처님의 사리도 흔치 않았기 때문에 인도처럼 사리탑을 봉안한 석굴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석굴들 중 상당수는 승려들이 방해를 받지 않고 수행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석가모니의 사리탑 대신 불상이나 보살상을 모시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생담이나 불전을 벽면에 장식했다. 인도의 아잔타나 엘로라 석굴에는 사리탑 주변에 본생담과 불전을 그리거나 조각으로 새겼는데, 이는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절에서 볼 수 있는 팔상도와 같은 기능이었다. 인도에서는 부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해박한 이가 벽화나 조각의 내용을 설명했다고 하는데, 중국 석굴에서도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사진 4) 근래 보수된 27미터의 병령사 대불
(사진 4) 근래 보수된 27미터의 병령사 대불

 

병령사 초입에 있는 제3굴은 불상 대신 석탑이 모셔진 특이한 굴(사진1)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도 석굴에는 많지만 중국 석굴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굴들과 다른 느낌을 준다. 사각형의 방 중앙에 자리한 탑은 낮은 기단 위에 전면 중앙에 작은 사각형 감이 뚫린 기와집 형태로 만들어졌다. 지붕 위에는 노반과 복발로 구성된 상륜부가 있다. 탑 중앙의 사각형 감에는 작은 불상이나 사리장치를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탑의 각 벽에는 벽화가 그려졌으나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 있다. 굴 남벽에는 상하 두 곳에 불상과 보살상을 모신 감이 만들어졌는데 아래 만들어진 커다란 감에는 당나라 때 만든 당당한 모습의 의자에 앉은 불상이 있다. 손에 약함 같은 것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사진2)로 추정된다. 그 좌우에는 허리와 다리를 살짝 구부린 삼곡 자세를 취한 보살상이 서 있다. 이 삼곡(三曲) 또는 삼굴(三屈) 자세는 인도의 스투파에 장식된 약시와 같은 토속신이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굽타시대에는 이 유연한 자세가 딱딱한 보살상에 응용되었고, 이러한 자세가 구법승들을 통해 전해져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보살상에 표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때 유행하게 된다. 3굴 다음에 자리한 제4굴에 만들어진 당대 불보살상은 이들 불보살상과 매우 비슷하다. 아마 같은 장인이나 동일 집단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제3, 4굴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는 명나라 때 조성된 것이다(사진3). 아마 이전에 있던 벽화가 색이 지워지자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하나의 굴에서도 여러 시대를 거친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 중국 석굴의 특징이다. 그 굴이 여러 시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이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진 5) 보수되기 전 병령사 대불과 169굴과 172굴 및 두 굴을 연결하는 잔도 모습
(사진 5) 보수되기 전 병령사 대불과 169굴과 172굴 및 두 굴을 연결하는 잔도 모습

 

 병령사 석굴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탁 하니 높이 27미터의 커다란 불상이 나타난다. 가히 병령사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조성된 것인데 외부에 노출되다 보니 맥적산석굴의 대불처럼 마모가 많아 근래에 다시 보수하였다(사진4). 보수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구멍이 숭숭 나 있지만 부드럽고 생동감 있는 이전의 모습(사진5)보다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마도 이전처럼 부드러운 느낌이 들려면 그만한 시간이 지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병령사석굴의 백미인 169굴은 아무나 올라갈 수 없다. 중국 석굴 순례를 하다보면 곳곳에서 입장료와 달리 추가 관람료를 내야 하는 곳이 있다. 특히 돈황석굴처럼 굴이 많은 경우는 사전에 어떤 굴을 볼 것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기본 관람료로 허가된 곳만 봐야 한다. 그렇다 보니 어렵게 간 순례 여행에서 꼭 봐야 하는 굴을 놓칠 수 있다. 병령사 169굴도 그런 굴 중 하나이다. 대개 입장료보다 특별 관람료가 더 비싸다. 병령사 석굴 입장료가 50위안(2020년 기준)인데 반해 169굴 관람료는 300위안(대략 5만원 정도)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만한 가치가 있다. 169굴 이외에 126, 128, 132굴도 60-80위안의 추가 요금이 있다. 게다가 사진 촬영도 금지이다. 이런 요금 체계를 상술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관람하면 제대로 보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개방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한라산의 경우도 등산로를 폐쇄하고 휴식제를 갖는 것처럼 유적도 마찬가지이다.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사진 6) 병령사 169굴과 잔도로 이어진 172굴 불상과 벽화
(사진 6) 병령사 169굴과 잔도로 이어진 172굴 불상과 벽화

 

 169굴에 가면 덤으로 172굴도 볼 수 있다. 병령사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대불 위로 아슬아슬하게 만들어진 잔도라 불리는 공중난간을 걸어가야 만날 수 있다. 사람의 손을 덜 타서인지 아름다운 불상과 벽화(사진6)가 잘 남아 있다.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169굴과 172굴을 이은 잔도에서 보는 석림의 경관이 아주 좋다. 고소공포증만 없다면 병령사에 가면 꼭 169굴은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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