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⑥ - 물난리와 머리 헝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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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⑥ - 물난리와 머리 헝클어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8.2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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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박인수 _ 자유기고가

“오늘 오전에 비 소식이 있겠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니 머리 헝클어짐에 주의하세요.”
지난 6일 아침 휴대폰 앱으로 봤던 날씨 예보다. 장마가 계속되는 탓에 남부지방에 이어 중부지방도 물난리를 겪는 때, 한강이 위험 수위까지 도달하는 상황에서 ‘바람이 많이 부니 머리 헝클어짐에 주의하라’는 문구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날씨 앱을 관리하는 사람은 상황 파악이 더딘 사람이거나 아니면 사태 파악이 전혀 안 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천 명의 이재민이 비상대피소에서 밤을 지새우고 얼마나 더 큰 피해가 있을지 모르는 터에 어찌 그런 문구를 쓸 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수해(水害)는 남의 일이고 머리 헝클어짐은 전적으로 내 일이므로. 제3자가 보는 객관적인 시각에선 당연히 이미 비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또다시 비가 오는 것이 훨씬 심각한 사안이겠으나 아침 일찍 서둘러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출근하는 직장인의 입장에선 자신의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이 더 중요한 사안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 날이 면접을 보는 날이라면 더더욱. 이것은 이기주의도 아니고 개인주의도 아니다. 그저 남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인간인 까닭이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규정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다른 지역의 재난보다 내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을 더 염려하는 것이 비이성적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 맞는 말이다. 일면 이기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생각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생존 전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국가의 안정보다는 나와 내 가정의 안전이, 다른 노동자들의 처지보다는 내 생계를 더 걱정하는 것이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는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우리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잘못 알고 있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하면 이기주의로 된다고 학교에서 배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조차 이기주의는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고,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태도”로, 개인주의는 “사회나 국가 따위의 집단보다 개인이 존재에 있어서도 먼저이고, 가치에 있어서도 상위라고 생각하는 사상”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도대체 이 두 개념의 차이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른 점이라면, 이기주의는 ‘자신만의 이익을’ 꾀하는 반면, 개인주의는 ‘집단보다 개인이 우선’이라고 여기는 태도 정도일까. 그렇다면 이익 추구 여부에 따라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나뉘는 것인가.
이기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태도를 말하는 반면, 개인주의는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입장이다. 이기주의(利己主義)의 반대는 이타주의(利他主義)이고 개인주의(個人主義)의 반대는 집단주의(集團主義)인 것이다. 칼 포퍼는 개인주의는 이타주의와, 집단주의는 이기주의와 연계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수도권의 고급 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곳이라면 “주민의견 무시하는 행복주택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종종 볼 수 있다. 행복주택이란 무엇인가. ‘대학생·청년·신혼부부 들을 위해 직장과 학교가 가까운 곳이나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곳에 짓는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이다. 행복주택 주변엔 국·공립어린이집과 작은 도서관 등의 주민편의시설도 함께 만들어진다. 그런데 왜 기존 아파트 주민들이 ‘결사반대’를 하는 것일까. 자신들의 아파트 주위에 행복주택이 지어지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신주의에 포섭된 이기주의의 극치인 것이다.
개인주의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당신의 견해가 지켜질 수 있도록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볼테르의 선언이 바로 개인주의의 핵심이다. 즉 내가 (개인으로서) 소중한 존재인 만큼 당신 또한 (개인으로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개인주의는 사실상 싹조차 틀 수 없었다. 한·일 스포츠 경기 때마다 드러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과도한 집착은 개인이 말살된 집단주의의 전형이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다. 인간은 경쟁자를 찾을 수 없는 최상위의 포식자이고, 이미 지구상의 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시킨 바 있으며, 인간 스스로도 인류 멸종을 향해 급속도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이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교육과 인간관계, 사회생활을 통해서 인간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100인이 있으면 100가지 색이 있는 것, 그것이 개인주의의 요체다. 

*그 날 날씨 예보 문구는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오늘 오전에 비 소식이 있겠습니다. 바람이 많이 부니 외출 시 창문을 닫아 두세요.”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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