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의 고향을 가다① - 제4차 결집의 고장 카슈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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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의 고향을 가다① - 제4차 결집의 고장 카슈미르
  • 안종국 기자
  • 승인 2020.08.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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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說을 배제하고 正法을 지키기 위한 교학과 수행의 최적지
제4차결집처라고 주장하는 카슈미르 하르완승원터. 카슈미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이설을 배제하고 정통 법을 보호할 성지로 간주되었다.
제4차결집처라고 주장하는 카슈미르 하르완승원터. 카슈미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이설을 배제하고 정통 법을 보호할 성지로 간주되었다.

 

불교학은 거대한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이 그 갈래와 흐름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녹야원에서의 초전법륜이래 지난 2,600년 동안 불교는 머나먼 길을 돌아 동아시아의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렸다. 그 인연으로 한국불교는 지혜와 수행의 샘이 되어 중심적인 사상사의 흐름을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삶의 진리를 체득하게 했다. 
그러나 미얀마를 위시한 남방불교와 티베트불교, 대만과 베트남 등등 세계 여러 나라 불교를 접하다보면 한국불교에 대한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중국을 통해 대승불교를 받아들인 한국불교는 ‘범망경(梵網經)’을 율장의 계목으로 지키고 있다. 그런데 ‘범망경’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팔만대장경에도 중국에서 찬술한 경전이 적지 않다. 우리가 공부하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은 정말로 부처님의 친설(親說)일까? 
지금 한국불교를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로 우리는 굳게 믿고 있다. 과연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공부하고 역경(譯經)을 했던 인도의 그 대승불교와 한국의 대승은 같은 것일까? 
인도의 전통을 승계했다는 티베트불교는 체계적인 교학으로, 스리랑카.태국.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와 베트남(대승이 주류)의 상좌부는 율장을 생명으로 삼는 남방불교의 명확한 정체성에 비해 한국불교는 선불교를 내세우지만 중국과 일본의 아류로 이해되어지는데 문제가 있다. 
불교학은 문헌에 대한 비평학이다. 실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듯이 동아시아의 종파불교도 불교경론에 대한 각양각색의 분류와 평론에 의한 것이었다. 
불교학은 비판을 근본으로 한다. 그중에서 세친의 ‘구사론’과 이를 비판한 중현의 ‘순정리론’을 읽으며 그들의 치열한 구도적 논쟁의 고향을 가고 싶었다. 
불교를 삶의 중심 가치로 삼으면서 문득 불교학의 원류를 찾는 여정을 버킷리스트에 올려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1999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이십여 년을 북인도와 스리나가르, 카슈미르와 간다라의 불교학 본고장을 순례하였다. 
한국대승불교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렇게 시작된 순례는 결국 인도에서도 불멸후 발생된 수많은 갈래를 바로 잡으려는 결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결집이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法)과 율(律)이 잘못 해석되고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통으로 돌아가기 위한 승가대회였다. 이런 맥락에서 대승불교의 산실인 카슈미르 불교와 4차 결집을 먼저 알아야 편중된 중국 대승불교 시각을 넘어 인도 대승불교의 분화과정과 초기불교와의 관계까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원(願)을 세우게 된 것이다. 
보통 4차 결집은 정통성 논란을 안고 있다. 남방에서는 기원전 1세기 스리랑카에서 상좌부 빨리 경전을 야자 껍질에 최초로 문자화 한 것을 4차 결집으로 본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서기 1세기 인도 북부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설일체유부(법은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라고 주장)의 주도로 결집이 이루어진 것을 4차결집으로 인정한다. 
카슈미르 하르완이 바로 이 4차 결집지라고 인도고고학 스리나가르지부에서는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근거한 주장으로, 이곳이 결집처인지는 명확하지는 않다. 
설일체유부는 18부파가운데 하나로서 대중부와 쌍벽을 이루는 大 부파였다. 설일체유부는 뿌리가 상좌부(Sthavira)로 현재의 남방불교와 같은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설일체유부는 서북인도, 북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교세를 떨쳤고, 중국에 아함경(Āgama)을 전해 주었다. 
불교학 여정지로 가장 먼저 스리나가르의 이 4차 결집을 떠올린 것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 등 삼장의 주석을 통해 정법을 확립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4차결집은 카니시카왕(서기 127-150년 무렵) 재위시 파르슈바(협 존자)의 발의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정통 유부학설을 확립하고자 했다. 즉 상좌부와 설일체유부가 자신들의 교설의 정통성 확립을 위한 결집이었던 것이다.    
카슈미르 불교와 4차 결집은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후원에 의해 이후 동아시아에 대승불교의 이념을 제공한 아슈바고샤(마명보살, 서기 80~150), 나가르주나(용수보살, 서기 150~250), 바수반두(세친보살, 4세기) 쿠마라지바(Kumārajīva, 서기 334~413) 삼장 등 기라성같은 논사들이 줄줄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분들이 이곳 카슈미르에서 활동했음을 볼 때, 이곳은 대승불교의 산실이면서 동아시아 더 나아가서 한국불교 대승교학의 이념의 산실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은 원효가 주석을 붙인 ‘대승기신론소’로 우리에게 의미가 깊다. 많은 학자들이 ‘대승기신론’은 아슈바고샤의 저술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여전히 그를 저자로 믿고 있다. ‘금강삼매경’을 비롯하여 ‘원각경’과 ‘능엄경’도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하고, ‘화엄경’도 중앙아시아에서 만들어졌다는 연구서도 나와 있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중국 찬술의 경론을 교학의 정통으로 삼고 있다. 아슈바고샤의 저술이 확실한 것은 부처님의 일생을 노래한 ‘붓다짜리타’, 즉 ‘불소행찬’일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불교문학가가 논사로서 추앙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나가르주나는 ‘중론’(Madhyamaka-śāstra)을 비롯해서 십이문론, 대지도론, 십주비바사론, 회쟁론, 대승이십송론, 보행왕정론, 보리자량론 등 많은 대승 논서를 저작했다.
바수반두는 ‘아비달마구사론’을 지은 대석학이고, 형제지간인 아상가(무착보살, 서기 300~390)는 ‘섭대승론’의 찬술자이다.  
카니슈카는 인도 쿠샨 왕조의 제3대 왕이고, 쿠샨 왕조는 1세기에서 4세기 경까지 존재했으며, 타지키스탄, 카스피海, 아프가니스탄, 갠지스 강 상류를 가로지르던 제국이었다. 월지 민족이 인도의 그리스 왕국이었던 박트리아를 몰아내고 세운 왕국으로, 언어는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그리스 예술의 영향을 받아서 이른바 간다라 미술로 발전하였고, 최초로 불상을 만들기도 했다. 카니슈카 왕은 아소카 왕과 함께 불교의 대보호자로 추앙되었다.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카니시카 왕이 불교에 귀의하고 틈틈이 부처님의 기르침을 공부하던 중에 강설자에 따라 논의가 달라 의혹이 생겼다. 이에 협존자가 “여래가 세상을 떠난 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형성된 부파의 주장이 서로 모순될 뿐 아니라 각기 보고 들은 바에 따라 스승과 제자도 논의가 달라졌습니다.”라고 의견을 밝히자 왕은 이를 비탄하며 각 부파의 주장에 따라 삼장을 주석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따라 3명(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 6통(신족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갖추고 경.율.론 삼장과 성명(聲明), 인명(因明), 의방명(醫方明), 공교명(工巧明), 내명(內明)의 5명에 통달한 500아라한과 함께 간다라에서 카슈미르로 옮겨와 10만송으로 이루어진 우파데사(불타법문에 대한 논의)와 비나야비바사론과 아비달마비바사론을 지어 경.율.론의 삼장을 주석(註釋)하게 된다.  
그러면 왜 간다라가 아닌 카슈미르에서 제4차 결집이 이루어졌는가? 한마디로 카슈미르는 일찍부터 고행자들의 낙원으로 알려져 왔었다. 지금은 파키스탄 지역이지만, 탁실라에는 기원전 6세기부터 유명한 교육기관이 있었고, 인도 전역의 왕자들이 이곳으로 유학을 올 정도로 학문의 중심지였다. 스리나가르는 자연환경 조건 때문에 고대시대부터 구도자들이 모여들었던 천혜의 수행처였던 것이다. 
이곳이 불교의 중심지가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3차 결집 시에 1천 명 정도의 정통 비구만 인정하고 6만 명 정도는 가사를 벗기고 갠지스 강에 수장 시킨다는 끔직한 소문이 돌자, 거의 대부분이 히말라야 산록으로 도피했고, 상당수는 카슈미르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후가 되자 카슈미르 지역의 불교 승가는 여러 부파로 갈라지면서 혼란에 빠지게 됐다. 그래서 상좌부의 분파인 설일체유부 중심의 4차 결집이 단행됐는데, 500명의 아라한과 500명의 보살과 500명의 재가 불교지도자들이 삼장을 카로스티(초기 인도문자) 문자에 의한 간다리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재편집한다. 
카슈미르는 다른 이론가들의 왕래가 적어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기 좋았을 것이다. 카니시카왕은 새롭게 편찬한 경전을 동판에 새겨 넣어 석함에 넣고 스투파에 안치했다. 그리고 이설의 훼손으로부터 경을 보호하기 위해 허가받은 자들만 이곳에서 경을 보게 했다. 
4차 결집의 중심은 아비담마의 주석서인 마하 비바샤(Mahā-Vibhāshā)의 결집이다. 일부에서는 대승불교가 대중부에서 발전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대승의 보살사상은 설일체유부를 계승한 것이다. 
찬란했던 불교 논사들의 고향, 카슈미르 땅은 지금 이슬람문화가 중심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으로 항상 전운이 감돌며 불교의 빅슈가 사라진 지금은 이슬람교의 선승들인 수피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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