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추구를 위한 불교 부흥운동의 성지- 파리하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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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추구를 위한 불교 부흥운동의 성지- 파리하스포라
  • 안종국 기자
  • 승인 2020.08.2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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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의 고향을 가다② - 청정불국토 카슈미르의 아비다르마전통
파리하스포라 불교승원의 스투파(Parihaspur Stupa) 유적
파리하스포라 불교승원의 스투파(Parihaspur Stupa) 유적

 

파리하스포라(Parihaspur)는 카슈미르 중세왕국 카르코타제국(서기 603~1003)의 수도였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왕과 수령과 백성이 모두 삼보를 공경하였고, 나라 안에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 그들은 소승과 대승이 함께 행한다.”라고 기록했다. 당나라 출신 ‘차진조(悟空)’도 당 현종의 인도사절단으로 750년경 이곳에 와서 병을 얻어 귀국하지 못하고 카슈미르의 몽제사(파리하스포라대승원)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의 ‘오공입축기(悟空入竺記)’에서는 북천축 어디서나 살바다(Sarvāstivāda, 근본설일체유부)를 학습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카슈미르의 새로운 도성 스리나가르에서 2년간 ‘구사론’과 ‘순정리론’을 학습했다고 적고 있다. 현장은 ‘대비바사론’과 ‘아비달마구사론’, 그리고 ‘아비달마순정리론’의 강습을 통해 불교철학의 제문제를 파악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구사(kosa)론’이란 아비달마의 ‘핵심을 간추린 논’이라는 뜻이다. 중현(衆賢, Sanghabhadra)의 ‘아비달마순정리론’은 구사론에 대한 비판과 유부의 정의를 밝힌 논서다. 현장은 카슈미르에서 중현이 순정리론을 지었다는 승도가람, 스칸디라(悟入)논사가 ‘중사분비바사론’을 지었다는 小가람, 푸라나(圓滿)논사가 ‘석비바사론’을 지었다는 상림가람, 불지라(佛地羅)논사가 ‘대중부집진론’을 지었다는 대중부가람 등을 순례했다고 기록했다. 이 가람들은 현재 어디인지 순례하기가 용이치 않다. 세친도 카슈미르에서 추방될 때 카슈미르의 관문인 파리하스포라를 지나 간다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불교의 수행법은 매우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초기 팔리경전에서는 이를 ‘사문과경’과 ‘대념처경’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체계적인 논서로는 5세기의 스리랑카에서 활동한 논사 붓다고사의 ‘청정도론’이 있다. 청정도론은 40가지 선정주제를 집중명상하며, 위빠사나 수행도의 모델로 7가지 청정을 제시하고 있다. ‘대념처경’은 오늘날 미얀마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데, ‘염처’수행을 유일한 방법으로 설명한다.  

파리하스포라의 굽타이후시기 청동불상
파리하스포라의 굽타이후시기 청동불상

아비달마는 부처님의 현실적 가르침인 경전의 느슨한 일상적 대화체가 아니라 불교교설의 본질적인 가르침으로 확정적인 엄밀성, 즉 궁극의 진리에 관심을 두고 확정된 의미[了義]를 제시한다. 부처님이 일반 대중들에게는 대기설법으로 방편에 의해 설하지만, 최고의 엘리트 수행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궁극의 진리를 바로 설하였다고 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은 2세기 중기 카니시카(Kaniska)왕의 요청으로 협(脇) 존자, 법구(法救) 등의 논사와 500명의 대아라한이 12년 동안 모은 것이다. 중국 당나라 현장(玄奘)의 한역(漢譯)만이 현존하며 총 200권에 달한다. 
‘아비달마구사론(Abhidharmakosa, 阿毘達磨俱舍論)’은 4세기 세친(世親 Vasubandhu)이 지었다. 세친이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 승려였을 때 이 논서를 저술했고, 대승불교로 전향한 뒤에는 대승불교 경전에 대한 주석서도 많이 저술했다. 세친의 아비달마구사론은 설일체유부 또는 경량부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데, 붓다고사의 청정도론과는 서로 독립적으로 집필된 것이다. 간다라출신인 세친은 설일체유부의 학설을 비판하기 위해 카슈미르에 잠입하여 비바사(위빠사나)를 연구했다. 당시 카슈미르는 이설을 막기 위해 보안이 철저했다. 그러다가 카슈미르의 정통 설일체유부의 종장(宗匠)으로 불리는 중현의 스승인 스칸디라(悟入) 아라한에게 신분이 발각되어 본국으로 쫓겨간다. 아비달마구사론은 이후 귀국하여 저술한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다르마 체계는 75법을 갖고 있으며, 3개의 무위법이 포함되어 있다. 인도 전역에서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전통은 매우 영향력이 있었다. 아비달마는 ‘해체’해서 보기이다. 설일체유부는 환원적 방법으로 실재하는지에 대한 분석법을 사용했다. 즉 사물의 구성요소를 분해해버리면 단일한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비달마를 통해 불교는 철학적 사변을 갖는 듯이 보였고, 이어진 중관론, 유식학의 대승불교 철학과 여래장 사상까지 이러한 분석과 해체에 대한 증명의 타당성을 놓고 논쟁하다가 분석적 증명과정의 최종점에거 ‘자성’과 ‘무자성’을 논하고, 자성을 여읜 ‘공’사상에 이르러 불합리한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불교의 궁극 목적에 의문을 던지는 과제를 안게 된다. 
7세기에 카슈미르를 방문한 현장과 혜초는 이곳에서 소승과 대승이 한 승원 안에서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은 동일한 계율을 지켰거나 이론적 지향점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승비구들은 어디 출신이며,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 브라만계층이었을까? 왕족들이었을까? 불교교단의 분열에 있어 교리의 상이성은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까? 
물론 승원의 계율의 차이는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검소한 수행자들에게는 사소한 생활용품을 둘러싸고도 극도의 계율이 필요했다. 어떤 비구가 오후 불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다른 비구는 오후에도 식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심각한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다. 
불교는 교리보다는 행위의 불일치, 계를 둘러싼 이유로 분열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북인도 바이샬리에서의 제2차 결집이 일명 ‘사악한 비구’들 사이에서 상이한 계율을 해결하기 위해 소집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그 ‘사악한 비구’들이 ‘대중부의 기원’이라는 설에는 동의되지 않는다. 
대승의 기원을 계율의 상이함에서 찾는 것은 틀린 사고다. 소승계열의 근본설일체유부의 율장은 오늘날까지 대승의 계목으로 이어지며 티베트불교의 승원생활의 지침이 되고 있다. 한마디로 계율에 있어 대승의 계율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았다고 보인다. 당나라 현장이 보았을 때 한 승원안에서 소승과 대승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의 반증이 된다.  
소승과 대승의 분열의 단초는 아마도 ‘목적적 통찰’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승려나 수행자는 일종의 당위적 목적성을 갖는다. 이유없는 수행자는 없는 것이다. 가장 낮은 단계의 수행자들은 현생이나 내생에서 물질적 이익이라는 의도를 갖고 깨닫지 못한 행위를 수행한다. 중간 단계의 수행자들은 모든 고통과 윤회로부터 해탈하려는 바람, 즉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수행한다. 최고의 동기를 지닌 수행자들은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며, 남을 돕겠다는 보다 원대한 종교적 가능성을 위해서 수행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지향하는 이 수행자들은 열반 속에 안주하지 않고 가사나 계율이나 철학을 떠나 동기와 의도를 명확히 갖고 지향점을 갖는 승원생활과 행동양상을 추구하게 된다. 
용수나 세친, 마명과 적천(寂天, santideva, 서기 685~763)같은 대승의 대논사들이 소승의 승려와 다른 모습으로 다른 생활과 계율을 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지향점, 즉 의도가 달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부처님 이래로 유지되어온 똑같은 인도 비구의 모습 그대로였고,  계율도 테라와다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대승이 꽃피웠다는 카슈미르와 간다라에서는 적어도 5~6세기 이전까지는 대승의 그 어떤 독립적 교단이나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카슈미르에서 활약한 위대한 논사들에게 승원의 보시자들인 대중의 지지를 받은 대승불교라는 조직적 존재는 없었다.
그러면 대체 그들은 누구였을까? 엘리트 승려들에 반발하여 재가자들의 바람에 호응한 일종의 개혁운동이었다는 주장은 맞는 것일까? 재가자들의 반교권적 종교운동, 불탑기원설, 대중부기원설은 올바른 관점일까?    
대승이 재가자들과 관련을 갖는 개혁운동이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세속을 떠난 사문, 즉 불교수행자들이 존경받는 교단 내에서 지속적으로 전승 발전시킨 비구들이 중심이었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교학과 수행전통이 날란다와 동쪽의 승원대학으로 옮겨가지 전까지, 그리고 간다라와 중앙아시아에서 화엄경류의 보살장과 대승기신론서들이 만들어져 다시 되돌아 올때까지 카슈미르는 이설을 배제하고 부처의 정통 가르침을 보존하는 성지였다. 
대승의 초기발전은 산림(山林)의 승려들, 카슈미르의 청정한 불국토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대승경전은 도시적인 재가자의 헌신적인 종교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불교의 원래 지향점, 불성, 혹은 깨달음의 추구로 돌아가려는 철저한 지적, 실참수행적 고행의 산물이라는 것이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고장, 논사들의 고향인 카슈미르는 웅변하고 있다. 나는 ‘산야의 고행하던 출가자공동체’가 대승의 기원이라는데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한재희 ‘반주삼매와 대승불교의 기원’ 참조)
불멸 후 부처의 가르침이 이설로 혼탁해지자 일어난 대승은 매우 엄격한 고행적 불교부흥운동이었다. 서기 1세기, 쿠샨왕조 시기 등장한 ‘미륵대사자후경’에는 이상적 비구상을 산림에서의 엄격한 수행으로 극히 옹호하면서, 불탑숭배같은 저열한 종교적 실천에 참여하는 비구에게 엄격하지 못하다고 비난까지 하고 있다. 초기 대승불교의 특징인 불수념은 가상의 붓다를 친견하고 그것을 실체화하면서 새로운 경전을 생산하게 되고 이 경전확산운동은 아미타불 관상과 공사상의 현화로 대승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붓다가 80세로 열반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면서 붓다 관상 명상법의 통찰로 ‘법신’의 존재를 현화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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