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2] -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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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2] -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0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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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무오년 항일투쟁의 근거지였던 법정사는 서귀포시 도순동 산1번지에 있는데 관음사의 안봉려관과 김석윤 등이 1911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1914년에는 김연일 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1918년에는 정구용, 장임호 등 도외 출신 7명이 입도하여 법정사에 체재하고, 또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와 방동화, 선도교의 박명수도 함께 하면서 한층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일제 축출과 국권 회복이란 양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들을 몰아낸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설정하여 제시했다. 이어서 서귀면과 중문면 그리고 금악리, 오등리의 이장들에게 〈일본인 관리와 장사치를 살육하거나 몰아내야 한다〉는 요지의 격문을 배포하였다.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선포하여 총지휘를 하고, 박명수를 도대장, 강창규를 선봉대장, 방동화와 강민수를 각각 좌․우대장, 양남구를 중군대장, 김삼만을 후군대장, 장임호를 모사(謀師)에 임명하여 조직을 갖추고, 10월 7일(음력 9월 3일) 새벽 4시 스님 16명을 비롯한 법정사에 집결한 봉기군 34명이 곤봉과 화승총 등으로 무장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서귀포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도순리, 영남리, 강정리, 서호리, 호근리에서도 가담자를 확보하였으며 하원리에 이르자 항일항쟁에 참여한 가담자가 300-400명에 이르렀으며 마지막에는 700여명으로 늘어났다.
1차 목표는 서귀포주재소였지만 여의치 않아 2차 목표인 중문주재소에 도착하자 건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 및 경찰, 일본인 상인 3명을 납치한 후 13명의 조선인 구금자를 석방했다. 이에 일본경찰은 목포에 증원을 요구하였으며, 비상연락을 받고 도내 각처에서 경찰이 출동하였다. 출동한 기마경찰대와 지금의 서호리 스모루 입구에서 격돌했다. 그러나 좋은 무기와 잘 훈련된 일경에 맞대결할 수가 없어 현장에서 38명이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피하여 흩어지면서 거사는 끝나고 말았다.

로천 김대규화백과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고영철 회장
로천 김대규화백과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고영철 회장

 

비록 거사 당일에 진압되고 말았지만 6개월여의 사전준비 기간에도 발각되지 않았고, 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법정사에 가서 의거에 동참했으며, 주동자들이 오랫동안 은신이 가능했을 정도로 제주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컸던 것으로 보아 창건 이후 8년여 기간 동안 지역민들에게 신뢰를 주고 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추측된다. 주동자들은 김연일 10년을 비롯하여 총 66인이 8년∼6월의 징역형 또는 벌금형을 받았다. 2004년도에는 이들을 기리는 의열사가 준공되었으며 기념탑도 세웠다.
창건 당시의 법정사는 초가 법당이었다고 하나 항일투쟁 직후 일본 경찰에 의해 불태워졌다. 현재의 법정사는 시멘트벽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초라한 모습이며, 지금은 상시 거주하는 분도 없는 듯하다.
고지천 동쪽에 있는 건물 잔해를 당시의 법정사 터라고 하여 안내판을 세워 놓았으나 여러 사람의 증언은 이와 다르다. 하천 서쪽이 원래 법정사 터이고 동쪽에는 화전민이 살던 곳이라는 주장이다. 필자가 1996년에 이곳에서 만났던 미만화 보살님도 옛 법정사 터에 현재 건물을 세웠다고 증언하였으며, 이곳에는 당시 건물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들도 여러 개 남아 있다. 정확한 법정사 터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법정사의 바로 동쪽에는 있는 고지천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져 경관이 수려하다. 이 옆으로 한라산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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