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3] - 발타라존자 전설 아련하고 임제도 머물며 시를 남긴 한라산 선돌 두타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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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3] - 발타라존자 전설 아련하고 임제도 머물며 시를 남긴 한라산 선돌 두타사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0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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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화백과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고영철 회장
로천 김대규화백과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고영철 회장

 

서귀포시 상효동 선돌 바로 남쪽 아래(상효동 산85-3번지 중에서 상효동 1592번지의 북서쪽.)에는 2,000㎡ 정도의 평지가 있는데 이곳에 조그만 초가로 된 법당이 있다. 2003년 1월 故조성화 스님에 의하면 이곳이 옛날에는 발타라사→쌍계사→정방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정방사는 100여년을 존속했던 절이라고 하는데 앞의 두 절은 창건년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형상 목사 때 폐찰되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면 1600년대에 절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고증할 만한 증거로는 임제의 남명소승의 기록이 있다. 임제(林悌)가 1577년 11월 9일 제주에서 쓴『남명소승(南冥小乘)』에〈相顧一噓而下從上峰南轉向頭陀寺 … 寺在兩溪之間亦號雙溪庵〉이라는 글이 있다. 두타사라는 절이 두 계곡의 사이에 있어서 이름을 쌍계암이라고 한다는 내용이다. 안타까운 것은 두타사에서 잠을 잔 것 말고는 다른 정보가 없지만 시 한 수를 남겼다.

신선의 벗을 따라 영지를 캐어 돌아오는 길 
구름 노을 자욱한 골짝에서 돌문을 두드린다. 
쇠북 소리 그친 절집에 산은 오직 적적한데  
시내에 밝은 달 홀로 나의(蘿衣)를 비춘다.

로천 김대규화백과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고영철 회장
로천 김대규화백과 제주문화유산답사회 고영철 회장

 

2004년 제주도가 발간한 제주불교유적조사보고서에는 두타사 터를 선돌선원 법당 서쪽이라고 하였고, 두타사 터에 남아 있는 주춧돌이 16개이며 건물의 크기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건물 정면은 남쪽이다. 부처를 모셨던 자리(감실)의 초석 2기가 건물지 안에 남아 있는데 두 초석 사이의 거리는 220m이다. 나머지 터는 현재 법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분은 두타사 터가 아니라는 반론은 아니고 그 주춧돌이 조선시대 기록에 있는 옛 두타사의 유물이 아니라 1935년 지었던 정방사의 유물이라고 한다. 현재의 정방사가 현재의 선돌선원 부근(당시 이름은 쌍계사)에서 1935년 장성 백양사의 지원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정방사로 이름을 바꿨다. 정방사 소장 유물 가운데 〈昭和七年一月二十日 全南 濟州島 右面 上孝里 雙溪寺〉라는 명문이 있는 불구가 있어 상효동이라는 지명으로 볼 때 이 말은 신빙성이 매우 크다.
필자의 답사에서는 법당 옆에 20cm×20cm 정도의 주춧돌이 일정한 규격에 맞추어 열다섯개가 땅에 박혀 남아 있다. 주춧돌로 봐서는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법당 뒤에는 비탈을 깎고 돌로 쌓은 벽이 있는데 이 벽은 2003년 현재 거주하고 있는 조성화 스님이 30여년 전에 왔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90여년 전 절집을 지을 때 조성한 옹벽일 가능성이 크다. 100여평쯤 되는 마당에는 수십년생으로 보이는 감나무가 세 그루 서 있다. 감나무는 자생이 아니라 누군가가 심은 것일 것이다. 또한 법당 아래쪽 어느 정도 평지인 곳에는 오래된 말방아가 있다. 말방아의 크기를 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동원됐을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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