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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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풍경소리
  • 유 현
  • 승인 2020.10.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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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을 타고 가을이 오고 있다. 한창 붉게 타오르던 ‘꽃무릇’마저 시절인연에 따라 시들해지더니 노란 국화가 활짝 피어나 그 빈자리를 채운다. 
황국단풍黃菊丹楓의 가을빛이 그윽하고 맑으매 내 마음도 깨끗해지고 고요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잎이 조락해 버린 목련을 보노라면 쓸쓸하고 허전한 마음을 가누기가 어렵다. 
산방의 처마 끝에 달아 놓은 풍경이 ‘뎅그렁뎅그렁’ 시를 쓰고 있다. 평범한 시가 아니라 바람이 읊고 가는 소리 시다. 
풍경은 원래 절의 전각처마 끝에 달린 조그만 종이다. 그 가운데 추를 달고 밑에 물고기 모양의 쇳조각을 매달아 바람으로 소리가 나기 때문에 풍경이라 한다. 물고기를 단 까닭은 눈먼 범부들이 풍경소리를 듣고 자신들의 업을 씻어 다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거나, 눈을 늘 뜨고 사는 물고기처럼 눈 뜬 수행자의 끈을 놓지 말라는 바램에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펑링[風鈴]이라 알려져 있는 풍경을 종교적으로 신령스런 처소뿐만 아니라 가정집에서도 매달아 장식한다. 바람의 존재를 알리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좋아서 나 역시 출리산방의 처마에 달아 놓았다. 
바람은 보이지 않은 악기. 풍경소리는 청각의식을 활성화해 무명에 잠긴 나를 깨운다. 바람아! 나는 네 말을 알겠다. 
「밀린다 왕의 물음」에 나오는 “메난드로스 왕과 존자 나가세나와의 선禪문답”에서, 나는 그 해답을 찾아본다.
“존자 나가세나여, 어디에 지혜가 실재합니까?”
“대왕이시여, 어디에도 없습니다.”
“존자 나가세나여, 그러면 지혜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대왕이시여, 바람은 어디에 실재하고 있습니까? 바람이 있는 곳을 아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자여, 어디에도 바람이 있는 곳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러면 바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까?”
대략 기원전 2세기 후반 북 인도를 통치하며 간다라 미술을 동북아로 전파한 그리스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사상에 비추어 ‘고타마 붓다’가 누구이고, 또 불성佛性의 참뜻이 무엇인지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당대의 선지식인 나가세나 존자에게 이렇게 여쭤 본 것이다. 
붓다가 될 가능성을 불성이라 하여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대승불교에서는 목이 쉬도록 말하는데, 조주趙州 선승은 왜, 개에겐 없다고 할까.
용수(Nāgārjuna)의 중관에서는 불성의 유무를 논리적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를 배척한다. 불성은 반야(Prajňā) 직관에 의해서 파악된다. 간화선의 화두 타파 후 견성見性도 이와 다름이 없다. 수행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사람이나 개 모두 안·이·비·설·신·의 여섯 감관을 갖추고 있다. 밖의 물질적인 대상과의 접촉은 눈, 귀, 코, 혀, 몸을 통해서, 안의 정신적인 것과의 접촉은 의(意,mano)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 여섯 감관 중에서 개는 귀와 코의 감관 능력이 사람보다 월등하고, 사람은 일체 중생 가운데 마노의 감관 능력이 으뜸이다, 그 의문意門을 지키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팔정도의 일곱 번째 정념(正念, sati)이다.
아름다운 풍경소리는 사띠(정념)와 사마디(집중)의 힘으로 통찰 지혜(프라즈냐, 반야)가 드러날 때 시방 세계에 울려 펴진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빠져있다면 바람의 존재를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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