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현대인의 삶…연기법에 해법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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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현대인의 삶…연기법에 해법 있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0.28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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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스님,“코로나 이후 사회변화와 불교의 역할”종단협 주최 제주강의
보일 스님
보일 스님

 

과연 코로나 이후 불교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에 대해 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원행스님, 조계종 총무원장)가 10월21일 제주 롯데호텔 세미나실에서 진지한 고민을 나누었다. 
이날 강연은 해인총림 해인사승가대학 학장 대행 보일스님이 다양한 시청각 예시 자료를 통해 해법을 제시하였다. 
보일스님은“4차 산업혁명 속에서 우리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데이터’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별개라고 여겨진 각각의 정보가 인공지능(AI)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 연결되고 지능화되는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 기록된 기록들을 디지털로 정보화되거나 인터넷을 통해 온라인화되지 않으면 이제는 더 이상 자료적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어서“4차 산업혁명을 먼 미래에 활용될 기술이거나 특정 선진국만의 전유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번 코로나19라는 상황에서‘비대면’이라는 여건속에서 4차산업혁명은 급격하게 우리 곁으로 파고 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아닐 발표한 초록을 요약하여 게재한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질병관리본부에 해당하는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의 앤서니 파우치 소장은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며, 종식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강조했다. 덧붙여 “수십억 개의 백신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제 끝나가나 싶던 사람들, 특히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탁월한 수준의 방역 성공을 이뤄낸 우리나라 국민들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 법하다.
도대체 이 암흑 같은 끝없는 터널을 언제까지 지나가야 하는가. 오랜 코로나 봉쇄조치와 방역,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집단적 피로감은 누적되고 있다. 날카로운 경계심은 어느새 익숙한 위기감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요즘이다.  
이 거세고 혹독한 폭풍이 지나가면, 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과연 우리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혹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세계 경제와 다를 바 없어서 경제 대공황이 예상된다고 하고, 혹자는 자유무역주의의 종언이라고도 한다. 어쩌면, 이제는 이 팬데믹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 이런저런 미래 예측의 공통점은 이전과는 다른 일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은 인터넷과 실시간 언론 보도 세대가 겪은 첫 팬데믹이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바이러스의 확산과 피해 정도를 동 시간대에 확인할 수 있어서 투명성은 확보할 수 있었지만, 심리적 충격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하다.
우리는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 수많은 시신이 집단으로 매장되는 모습들을 여과 없이 지켜봐야 했고, 심지어는 그 시신들이 안치돼야 할 관이 모자랄 정도였다. 정보가 투명한 만큼 적나라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고,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감염자의 수만큼 매시간 심리적 압박감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코로나 이후?
코로나가 얼핏 가라앉는 듯한 추세일 때만 해도, 사람들은 코로나 이후를 고민하고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코로나가 종식되는 날을 기다리기보다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는 것이 우선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하버드 대학 보건대학원 T.H. 찬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만약 백신이 제때에 개발되지 않는다면, 코로나가 2024년까지도 유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여기서 더욱 암담한 것은 코로나가 끝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최근의 통계는 21세기 들어, 대규모 바이러스의 발생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가 연이어 발생했고 또 다른 바이러스의 발생 가능성도 아주 높게 예상하고 있다.
이름만 바뀔 뿐, 새로운 바이러스는 새롭게 생겨나고 인류를 위협할 것이다. 한 마디로 코로나가 종식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잠시 또는 임시라고 생각하는 생활방역이 앞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코로나 이후를 얘기하기 전에 현재의 사태를 대하는 우리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최근 통계는 21세기 들어, 대규모 바이러스의 발생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가 연이어 발생했고 또 다른 바이러스의 발생 가능성도 아주 높게 예상된다. 이름만 바뀔 뿐, 새로운 바이러스는 계속 생겨날 것이고 인류를 위협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코로나와 같은 대 유행병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뉴노멀(New Normal)
우리는 지금 소위 ‘뉴노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전에 없거나 하지 않았던 삶의 양식들이 이제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삶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의 일상 영역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코로나 사태 초기에 각국이 보여준 국경봉쇄조치를 기억할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현재도 이 조치가 계속되고 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 간의 항공기, 선박, 철도 운행이 잠정 중단된 상태이다. 자국의 안보와 자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게 되면서, 재화 공급망의 붕괴로 인한 물자 조달이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암담하게 만드는 건 봉쇄와 폐쇄 또는 분리와 단절이 가장 효율적이고 손쉬운 선택지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향후에도 언제든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망설임 없이 국가, 지역 간에도 봉쇄와 폐쇄로 치달아 갈 가능성이 크다. 그 효용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말이다. 서로 연결하고 의존했던 나라와 나라 사이뿐만 아니라 공동체 사이에도 국경 그 자체보다 심리적 장벽이 더욱 높고 선명하게 그어지고 있다. 

단절할 것인가, 연대할 것인가
지난 설 연휴가 끝나갈 무렵, 남의 나라 중국에서 발생한 독감 바이러스 정도로 여겼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세계적 대 유행병이 되었다. 일부 지역의 고통이 전 세계적 고통으로 번져나가는 모습, 개인의 고통의 집단의 고통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붓다의 연기법을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우리 공동체의 운명이 서로 의존적이며, 우리의 안전이 곧 이웃의 안전에 달려있다는 점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결국 지구 공동체의 인류 전체가 동질성을 느끼는 상황이 되고 있다.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심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전체 공동체를 순식간에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짜 두려운 바이러스는 대중의 분노와 맹목적 불신, 단절과 폐쇄심리에서 오는 공황 상태일 것이다. 즉 정말 심각하고 위험한 것은 코로나 대유행 그 자체보다도 그 속에서 야기되는 인간들의 심리적 야만성일 것이다. 
결국 대유행이든, 대혁명이든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그 엄청난 변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그들의 존망과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은 이제 제2차 대유행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다가오는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분리와 단절의 선택을 할 것인지, 신뢰와 연대로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비대면의 역설
코로나 팬데믹이 덮쳐오자 이전에 없었던 모험적인 실험들이 전 방위적으로 시작됐다. 백신과 치료제 연구개발과 관련해 소요되는 인허가 시간을 대폭 단축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전에 당연시했던 것들이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거나 비상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반면에 이전에 등한시했던 시스템이나 제한적이고 부분적 영역에서 활용되었던 기능들이 주류적 가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정상적인 법칙들이 중단되고,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학교 수업은 교실이 아니라 각자의 집에서 화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의료 진단 또한 대면 진료가 아닌 화상을 통한 실시간 원격진료가 시작되었다. 5G 인터넷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전에는 수업 집중도가 저하된다는 이유로 또는 이익집단의 반대 때문에, 가능하지만 실험 수준에 그쳤던 시스템들이었다.
갑작스러운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방법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실제 상황에 소환된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막상 시행하고 보니, 초기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새로운 변화 속에서 나름 효율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니 오히려 왜 진작 도입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현재 일반대학에서의 비대면 강의 수준이 과거 소위 사이버대학에서 축적된 교수법이나 강의 자료의 질적 수준에 비하여 높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대학이 사이버대학보다 훨씬 많은 등록금을 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원격진료 또한 마찬가지이다. 원격진료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서 진료와 치료에 매우 적합한 방식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의료격차 해소에도 큰 역할을 해내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거나 당연시했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의문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왕이면 인간들끼리 얼굴을 마주하면서 대화하고 느끼면서 학습하고 고통을 나누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고 효과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이 비대면 또는 비접촉 상황이 일시적일 거란 기대를 하면서 임시조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들이 있다. 만약 비대면을 통한 업무나 수업이 더 효율적이고 발전적인 형태라면 어떨까? 차선책이 최선책이 되는 현실 말이다. 일반 예상과는 달리 비대면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수록 직접 대면에 대한 바람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대면에 대한 효율성을 더 신뢰하고 익숙해져 가능 상황은 우리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하다. 일종의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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