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란?
상태바
일체유심조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1.04 14: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명의 족쇄를 풀어줄 창밖의 108要談”⑬
황경환21세기불교포럼 공동대표, 전 울산불교방송 사장
황경환21세기불교포럼 공동대표, 전 울산불교방송 사장

잃을 것을 염려하는 자여!

無塵

잃을 것을 염려하여 
벌벌 떨고 있는 친구여!
그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그러한 공포증은 없을 것이네.
그대의 것이 어디 있나?
모두가 관념(觀念)이 만든 
허상(虛像)일 뿐인데.
무상(無常)을 체득하고, 
고(苦)를 증득하고,
무아(無我)를 요달하여 
해탈의 피안으로
“가테가테, 파아라가테, 
파아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항상 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아니하여 영원토록 여여(如如)하게 머물게 되는 그런 소유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장하구나! 비구들아 나도 역시... 그런 소유물을 본 적이 없다.”
『뱀의 비유 경』(M22) § 22


라훌라 존자와 아난다 존자의 게송

재현 스님이 옮긴 라훌라 존자 게송(偈頌)이다.

두 가지를 갖춘 까닭에 
내 이름은 축복받은 라훌라.
붓다의 아들로 태어나 
법을 보는 눈을 얻었네.
번뇌 모두 씻어 
다시 태어나지 않으리.
삼명(三明)의 지혜로 불사를 보니 
공양 받을 만한 아라한이라.
쾌락에 눈멀고 갈망의 그물에 
사로잡힌 사람들.
마치 망태기에 든 물고기처럼 
해태란 이름의 친척들에 묶였네.
나 저 쾌락을 내려놓고 
마라의 사슬을 벗었어라.
갈망의 뿌리 뽑아, 
불꽃 사그라지니 서늘하여라.
『테라가타』(4장 8품 295~298)

[아난다]
친구가 떠나가 버리고 
스승이 서거한 자에게
몸에 대한 마음챙김과 같은 
그만한 벗은 없다.
옛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고 
새사람들은 나에게 낯서니
비 올 때 둥지 속의 새처럼 
오늘 나 홀로 선정에 드네.
『테라가타』(17장 3품 1041~1042)


일체유심조란?

산스크리트어인 찟따마뜨라(Cittamattra)를 중국 사람들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번역했다. 이 술어의 원류는 불멸(佛滅) 후 1천 년경 법상종의 개산조 미륵(彌勒)의 계승자 무착(無着) 스님이 유식(有識)에서 자주 인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화엄경 가운데서도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란 구절이 있다. 즉 ‘모든 현상은 오직 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뜻으로서, 한국의 불가에 널리 유포되어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너무 확대 해석하여 나름대로 소설을 쓰는가 하면,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슨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지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초기 경전의 아비담마 논서에는 ‘마음[Citta]이란 그냥 안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각기능이 대상을 접하면 거기에는 지각이 일어나고, 그 지각과 동시에 안다[識]가 일어나는 일련의 파도침과 같은 현상이 마음이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따라 일어나고 대상없는 마음은 독자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從從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從從法滅)이라. 이 말은 신라의 거성 원효 스님의 말씀이다. 마음이란 이 한마디 술어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교 공부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음이란 단어는 관례적 의미에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 대한 중요한 이론을 접할 때는 관례적으로 사용하고 통용되는 말의 뜻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허공에 걸린 달을
내가 보니 그도 나를 보고
내가 보지 않으니
달도 나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는 내 의식 안에 있다’(The world exist in my consciousness)라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