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선 선생이 들려주는 제주의 고문서 이야기 ⑨ - 전령(傳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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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선 선생이 들려주는 제주의 고문서 이야기 ⑨ - 전령(傳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1.0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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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선_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문창선_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원문)
傳令
閑良 鄭宗俊 住 过㠳 父 元得
御邊軍官差定不
輕隨行者
庚辰七月 日[官印 1顆]
中營[署押] 着名

번역)
변막(过㠳)에 거주하는 원득(元得)의 아들인 한량(閑良) 정종준(鄭宗俊)을 어변군관(御邊軍官)으로 임명하니 임무 수행에 가벼이 하지 말 것.
경진 7월 일
중영(中營)

해설)
전령(傳令)이란 조선시대 관부에서 관하(管下)의 관리·면임(面任)·민(民) 등에게 내리는 명령서를 말한다. 갑오경장 이후의 신식에서는 훈령(訓令)으로 개칭하였다. 현전하는 전령 중 1771년(영조 47) 11월 수어사(守禦使)가 전 부사 원후진(元厚鎭)에게 보낸 것이 있는데, “본청(수어청) 좌별장이 탈이 있어 대신 계(啓)하여 차정(差定 : 뽑아서 사무를 담당시킴)하였다. 전령이 도착하면 나와서 근무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곧, 근무명령서에 해당한다. 결사(結社)의 유사(有司)가 결사원에게 명령을 전달할 때에도 전령을 쓴다.
이 전령의 내용은 한량(閑良) 정종준(鄭宗俊)을 어변군관(御邊軍官)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한량(閑良)이란, ≪용비어천가≫에서는 ‘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 속칭한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한량은 본래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에는 벼슬도 하지 못하고 학교에도 적(籍)을 두지 못해 아무런 속처(屬處)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조선 후기 1625년(인조 3)에 작성된 호패사목(戶牌事目)에는 사족으로서 속처가 없는 사람, 유생(儒生)으로서 학교에 입적(入籍)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평민으로서 속처가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전기의 한량 개념이 그때까지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조 때 ≪무과방목 武科榜目≫에는 무과 합격자로서 전직(前職)이 없는 사람을 모두 한량으로 호칭하고 있다. 이는 이 무렵부터 한량이 무과 응시자격을 얻게 되면서 무과 응시자 혹은 무반 출신자로서 아직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의 뜻으로 바뀐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유습이 있어서, 요즘도 놀고먹는 편안한 이를 빗대어 ‘한량(閑良)’이라고 칭하게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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