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⑫ 죽여주는 여자가 필요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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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⑫ 죽여주는 여자가 필요 없는 사회
  • 박인수_자유기고가
  • 승인 2020.11.1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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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박인수 _ 자유기고가

소영은 종로 일대에서 남성 노인들에게 성을 파는 여성 노인으로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다. 그녀는 남성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는 여자’로 통한다. 어느 날 성병 검사를 하기 위해 들렀던 병원에서 우연히 코피노(한국인과 필리핀인 사이의 혼혈아) 소년 민호를 데려와 옆방의 성인 피규어 작가인 도훈, 트랜스젠더인 집주인 티나와 함께 고난하지만 평화로운 삶을 산다. 그러던 중, 한때 자신의 단골고객이자 뇌졸중으로 쓰러진 송 노인으로부터 ‘죽고 싶어도 자신은 혼자 죽지도 못한다’며 자신을 죽여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받고, 고민 끝에 결국 송 노인을 죽여준다. 그 일 뒤로,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은 노인들로부터 ‘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소영은 진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이재용 감독, 윤여정 전무송 주연, 2016)의 줄거리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2위이고, 1인당 GDP는 세계 27위인데 노인 빈곤률과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꼴찌다(전체 인구 빈곤률은 뒤에서 세 번째). 그 까닭은 한국의 노인들은 의료기술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수명이 연장되었으나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른 정년퇴직과 노인 복지가 미비한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노인들을 대하는 개인적·사회적 인식 또한 고령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관공서의 주차장엔 모두 다섯 개의 주차구역이 있다. 일반 주차구역,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 임산부 전용 주차구역, 전기자동차 충전구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르신 우선 주차구역 들이 그것이다. 운전자들은 일반 주차구역이 꽉 차 있어도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에 주차하는 건 엄두도 못 낸다. 위반하면 과태료가 10만 원인 까닭이 가장 클 것이다. 임산부 전용 주차구역엔 이따금 급하다며 주차한다. 대개 바로 앞에 있는 현금지급기에서 출금하기 위함이거나 ‘빨리 (일을 보고) 나오겠다’고 한다. 
그런데 어르신 우선 주차구역엔 시도 때도 없이 주차한다. 직원이나 민원인을 망라하고 주차하는데, 일반 주차구역에 빈 곳이 있어도 주차한다. 왜 그럴까. 단지 민원실과 20여 미터 가깝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까닭은, 아마도 노인을 존중하지 않는 탓이 첫 번째요, 그 다음으론 주차할 공간이 없어 옆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힘들게 걸어오는 노인들을 직접 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 노인들은 지금 우리가 편히 살 수 있는 집을 지었고 도로를 닦았으며 다리를 놓았던 세대들이다. 그들도 언젠가는, 죽고 싶어도 혼자서는 죽지 못해서 죽여주는 여자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한편 사뭇 다른 노인의 죽음이 얼마 전 있었다. 지난 10월 25일 이건희의 죽음에 대해 주류 언론사의 보도는 그야말로 ‘큰 별이 졌다’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많은, 그러나 그리 상관없는, 이들이 그의 장례식에 가서 추모의 말을 한마디씩 했다고 한다. 누구는 ‘아버지’ 운운했고, 누구는 ‘경제와 스포츠의 태산’이라고 했다. 그의 삶을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즉 지배 계급에게 이건희는 ‘한국 경제의 큰 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노동 계급에겐 더할 나위 없이 추악한 자본가일 뿐이지만.
그런데 이건희의 죽음은 가장 비참하지 않았을까 싶다. 앞에서 소개한 《죽여주는 여자》가 죽여주는, 삶의 희망을 잃은 노인들보다 더한 비참한.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삶은, 이미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전국에 79곳의 요양병원이 있는데 지자체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은 울릉도 단 1곳뿐이고, 나머지 78곳은 민간이 위탁 운영하는 곳이다. 노인들의 생명을 이익집단에 위탁한 나머지 노인들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간병비도 천차만별인데, 6인실의 경우 비싼 곳과 싼 곳의 차이가 두 배나 난다고 한다. 그나마 한 명의 간병사가 6명의 노인을 돌보는 요양병원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고, 요양원의 경우는 한 명의 요양보호사가 돌보는 노인이 많게는 20명까지 된다. 
요양원 수는 2018년 3,357개소, 2019년 3,569개소, 2020년 8월 현재 3,634개소로 지난 3년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요즘 급증하고 있는 주야간보호센터 또한 2018년 3,199개소, 2019년 4,154개소, 2020년 4,336개소로 대폭 증가하고 있다. 노인을 존중하는 태도와 노인을 위한 정책도 이러한 경향에 발맞춰 나가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현실의 그 분들은 죽여주는 여자가 필요치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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