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문’과‘점문’의 치열한 대립, 삼예사 논쟁의 의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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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문’과‘점문’의 치열한 대립, 삼예사 논쟁의 의미 ②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12.2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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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전통은 무엇인가? 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 지관쌍운과 정혜쌍수의 전통은 왜 이어지지 못했는가? 현대 한국불교는‘선’과‘위빠사나’의 흐름이 상호 대립하는 듯이 보인다. 이미 1,200년 전 티베트에서도 같은 논쟁이 불붙었다. 권표 스님은 불과 1~20년 사이에 널리 퍼진‘위빠사나’와 신라 선종구산 이후 오랜 전통이 된 한국불교의‘선’의 관계를 재조명하기 위한 고민과 의견을 본지에 보내왔다. / 편집자 주   
권표 스님 _ 제주시 화북 원명선원 한주
권표 스님 _ 제주시 화북 원명선원 한주

2, 논쟁의 배경과 중국 선종-날란다 전통의 대립

​토번의 왕으로 즉위한 치송데첸은 이러한 국내외의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을 잘 파악했다. 그는 이러한 외부의 혼란을 이용해서 토번의 부흥과 번영을 꾀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적으로 통일된 사상체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선대왕의 죽음과 더불어 당시의 티베트의 정치적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본(Bon)교의 불교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치송데첸은 본교를 숭배하던 귀족들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체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를 국교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치송데첸은 당시 인도의 최대 불교기관이었던 날란다 대학의 대학장이었던 샨타라크시타(725~783)를 초빙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티베트에는 갑자기 전염병이 돌았고 본교의 추종자들은 그것을 샨타라크시타가 티베트에 왔기 때문이라 탓하며 불교를 공격했다. 치송데첸은 이러한 정치적인 수세에 몰리게 되어 몇 달이 채 안되어 샨타라크시타를 인도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부터 10년이 지나 정권을 안정시킨 치송데첸은 샨타라크시타를 다시 티베트로 초청하게 된다. 이 때 훗날 독창적인 티베트불교의 창시자가 된 파드마삼바바가 함께 티베트로 왔다. 이를 계기로 궁궐에서 본교식 제사를 금지한 치송데첸은 일반인의 본교 숭배도 금했다. 775년 치송데첸은 마가다(인도)국의 오단타푸리사(寺)를 모방하여, 수도인 라사 동남쪽 삼예에 불교사원을 건립했다.
​전설에 따르면 건설 도중 전각이 자주 무너졌는데, 치송데첸은 이를 토착신의 방해로 여기고 파드마삼바바로 하여금 마귀를 물리치도록 했다. 파드마삼바바는 부처님을 그린 부적을 땅에 놓고 7일 동안 깊은 선정에 잠겼다. 격렬했던 싸움을 통해 결국에는 파드마삼바바가 크게 승리하고, 이후 12년 동안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만다라 형식으로 전각들이 배치된 삼예사에서 수미산에 해당하는 대법당은 779년에 비로소 완공됐다. 이곳에서 샨타라크시타를 계사로 구족계가 주어져 티베트 최초의 승단이 형성된다. 이어 치송데첸은 삼예사에 왕실의 가족들을 모아 숭불서약을 받았으며 비석을 세워 이를 대대로 증명토록 하였다.
​이처럼 불교는 치송데첸 왕에 이르러 국교로 공인되었고, 이를 토대로 확립된 강력한 국가체제는 티베트의 사상과 국론을 통일할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이후에 토번왕국은 크게 세를 이루어 간쑤성 지역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게 된다. 이때 둔황지역의 점령은 중국의 선불교가 라사로 대거 유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약 1200년 전의 티베트에서는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치열한 대립이 시작되고 있었다. 토번의 둔황 점령에 맞춰 히말라야로 들어간 마하연 선사는 치송데첸의 승인 하에 중국의 선불교를 티베트로 널리 전파하고 있었다. 이에 인도불교에 바탕을 둔 승단은 중국선종에 대한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중국선종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곧이어 중국선종 측에서 자살하는 자가 속출하는 등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여 금지령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다. 
치송데첸은 자국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중국불교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만약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티베트의 불교 뿐 아니라 국론의 분열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날로 더해가는 양측의 대립은 그 갈등의 끝을 봐야만 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샨타라크시타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에 앞서 양측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직감한 샨타라크시타는 논쟁이 벌어지면 자신의 제자인 까말라실라를 불러 논쟁에 임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치송데첸은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까말라실라와 중국선종을 대표하는 마하연을 불러 논쟁을 벌이도록 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의 향방을 결정지을 삼예사의 논쟁이 시작된다. 이 논쟁에서 패한 쪽은 티베트를 떠나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연장자인 마하연 측에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일체의 행위로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선한 행위를 한다면 좋은 과보를 받아 태어나고 악한 행위를 한다면 나쁜 과보를 받아 태어난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깨달음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거나 분별의 경계를 지워버린다면 부처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불사불관(不思不觀)한다면 경계의 순간에도 실재라는 착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궁극적인 지혜는 이와 같이 단숨에 증득할 수 있다.”
​이를 주의 깊게 듣고 난 까말라실라는 이렇게 반박했다.
​“당신은 그 어떤 것이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물의 모양을 잘 관찰하여 선악을 분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을 끊게 하는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부정하는 셈이다. 묘관찰지가 없다면 과연 어느 누가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또한 생각을 멈춰야 한다지만 그 생각 자체도 이미 마음작용을 일으켰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까말라실라는 마하연이 전개한 논리의 오류를 지적했다. 마하연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것은 망상에 불과하니, 일체작용이 멈춘 곳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무상(無想), 무취(無取), 무사(無捨), 무착(無着)으로 정의되는 반야바라밀은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기절하거나 술에 취한 상태 역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 된다. 하지만 관찰하는 행위가 없는데 어떻게 무분별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고 작용을 중지했는데 어떻게 일체법의 무자성함을 인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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