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수필 - 산책
상태바
마음 수필 - 산책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1.13 15: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희정
시인 . 도서출판 뷰티풀마인드 대표

57년 만에 제주섬에 찾아온 폭설이란다. 그러니 내 생애 처음 보는 광경인 셈이다. 중산간에 사는 나는 폭설 덕분에 일을 접고 며칠째 집에 갇혔다.(내심 기쁘다.)
눈은 폭폭 내리고(폭설은 펄펄 내리지 않고 폭폭 내린다.) 나에게는 얼마 전 받아서 읽기 시작한 법화경 강해(김해 정암사스님 법상스님 저술)가 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집콕생활이다. 
창 밖으로 폭폭 눈이 내려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책에 코를 박은 지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날 때였다. 삐릿, 서울댁 문자다.
“언니 산책 갈래요?”
“산책? 모험 아니고?”
답답해서 터져버릴 것 같다는 서울댁을 위해 나는 읽던 법화경 강해를 덮었다. 법화경이 어디 종이쪽지에만 있겠는가. 산책이든 모험이든 집을 나서기로 했다. 눈은 폭폭 내리고 등산화에 모자며 장갑이며 마스크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나선 길이지만 눈 쌓인 중산간 마을, 오솔길 산책은 모험에 가까웠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밟으며, 폭폭 내리는 눈을 맞으며 동네 아래 과수원길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귤들이 그대로 눈을 맞고 있었다. 푸른 삼나무도, 붉은 동백도 그대로 눈을 맞아들인다. 
제주 살이 삼 개월째인 서울댁은 귤이 얼어 못쓰게 되는 거 아닐까 걱정했다. 나는 귤 하나를 뚝 따서 보여주었다. 이 추위에도 뜨겁게 살아서 탱글탱글한 귤! 서울 댁은 놀라워했다.
제주도는 밭 가운데 무덤이 많다. 우리 동네 과수원에도 곳곳에 무덤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서울댁은 왜 산에다 무덤을 만들지 밭에다 무덤을 만드느냐며 무섭다고 내게 달라붙는다. 아, 정말 서울 사람 아니랄까봐서^^
제주도는 밭도 마을도 산이다. 산 따로 밭 따로 나눌 것이 없다. 바다와 한라산 그게 제주도니까. 그 산에 사람이 살만한 곳이면 마을이 되고, 밭이 되고, 무덤도 되고, 그런 것이다. 무덤을 지날 때마다 내게 달라붙는 서울댁을 보며 생각한다. 죽음이 무거운 건 삶이 무거워서가 아닐까.
걷다보니 한 시간 가까이 언덕을 걸어 내려왔다. 다시 돌아가려면 그만큼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막 돌아가려는데 귤이 주렁주렁 열린 외딴집에 주인 내외가 눈사람이 된 우리를 보고 들어오란다. 뜨거운 커피를 얻어 마시고, 난로 불에 몸을 좀 녹이고, 귤을 한 보따리씩 얻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전히 눈은 폭폭 내리고 있었다. 
귤을 얻은 서울댁이 마냥 신이 나서 “산책하길 잘했죠?” 하며 생색을 내어도 조금도 얄밉지 않은, 눈이 넉넉히 내리는 겨울날이다.
언덕 너머로 우리 집 지붕이 보일 즈음, 지칠 때가 되었는지 종알종알 말이 많던 서울댁 말소리도 끊어지고, 뽀드득뽀드득 발자국 소리와 좁은 오솔길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좁은 오솔길,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은 영락없이 계곡물 소리를 낸다. 눈을 감고 들으면 더 그렇다. 이 순간 내가溪계聲성便변是시長장廣광舌설….을 읊어대는 소동파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들 누가 환청이라고 하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