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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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7]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1.1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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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心宗을 깨달아, 行하는 것과 아는 것이 서로 어울려
커다란 善知識이 된 분들은, 이름이 傳燈錄에 실려 있는데......

 

大師╷ 始於五年[羊]ᄒᆞ샤 終至曺溪ᄒᆞ샤 說法 三十七年ᄒᆞ시니 
【諺解】大師╷ 五年[羊]에 비르서 ᄆᆞᄎᆞ매 曺溪예 니르르샤 三十七年을 說法ᄒᆞ시니 (大師가 五羊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曺溪에 이르시기까지 삼십 칠년을 說法하시니,)

【解說】⑴ ‘五羊’이란 廣州城에 있는 역명이다. 즉 五年이 아니다. 
⑵ ‘曺溪’는 雙峯山에 있는 曹溪로, 현재 중국의 廣東省 韶州府에 있는 지명이다. 이 땅의 소유자인 曹叔良이 대사에게 드린 것으로, 두 봉우리에 큰 시내가 있으므로, 조씨의 성을 따서 조계라 하였다고 한다. 대사께서 그곳에 寶林禪寺를 개설하여 법을 펴기 시작하시니 그 법을 이은자가 43인이나 되고 도를 깨달아 범부를 뛰어 넘은 이가 천 수백이나 되었다고 한다. 
⑶ 병 없이 신음하는 꼴이다. “한문은 문법이 없다.”는 말이 잘못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적는다. “始於五年[羊] 終至曺溪”를 언해는 “五年[羊]에 비르서 ᄆᆞᄎᆞ매 曺溪예 니르르샤 (五羊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 曺溪에 이르시기까지)”로 해석하였고, 필자는 “五羊에서 시작하여 曹溪에 이르러 마치다”라고 해석할 것이다. 언해의 해석을 따르면, ‘始’는 동사, ‘於’는 介詞(前置詞)로 간주하였고, ‘終’은 부사, ‘至’는 동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始於五年[羊]’과 ‘終至曺溪’이 對(짝)를 이루고 있는데, 어찌 ‘始’와 ‘終’이 각각 동사(술어)와 부사(부사어)로, 그리고 ‘於’와 ‘至’가 각각 개사와 동사(술어)로 다를 수가 있겠는가? 단지 실제 사용된 품사를 따라 해석하면, 한국어로 적당하게 구분하여 번역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위와 같이 번역하였겠지만, ‘始’와 ‘終’은 부사(부사어), ‘於’와 ‘至’는 ‘동사(술어)’로 쓰였음을 알아야 한다. 
상기의 설명들을 참고하여 해석을 아래와 같이 확정한다.
【飜譯】大師가 五羊에서 시작하여  曹溪에 이르러 마쳤는데, 설법한 것이 37년이었다. 

 

沾甘露味ᄒᆞ야 入聖超凡者ᄂᆞᆫ 莫記其數╷며 
【諺解】甘露ㅅ 마새 저저 聖에 드러 凡에 건너ᄠᅱ닌 그 數ᄅᆞᆯ 記錄디 몯ᄒᆞ며 ((그 동안) 甘露의 맛에 젖어서 聖人의 지위에 들어 凡夫를 건너뛴 이는 그 수를 기록하지 못한다.) 

【解說】‘甘露’란 천상에 있다는 물로 한번 마시면 죽지 않는다고 한다. 불법이 불생불멸의 妙道를 밝히는 법문이기 때문에 법이 곧 감로이다. 설법을 감로를 부어 주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상기의 설명들을 참고하여 해석을 아래와 같이 확정한다. 
【飜譯】[그동안] 甘露의 맛에 젖어서 聖人의 지위에 들고 凡夫를 넘어선 사람은 그 수를 기록할 수가 없었으며, 

 

悟佛心宗ᄒᆞ야 行解╷ 相應ᄒᆞ야 爲大知識者ᄂᆞᆫ 名載傳燈ᄒᆞ니 
【諺解】부텻 心宗을 아라 行과 解왜 서르 應ᄒᆞ야 큰 知識 ᄃᆞ외닌 일후미 傳燈에 시렛ᄂᆞ니 (부처의 心宗을 알아서 行과 解가 서로 응하여 큰 지식이 된 이는 이름이 傳燈에 실려 있느니,)

【解說】⑴ 佛心宗: 교학을 중심으로 하여 연구 수행하는 것을 敎宗, 근본 一物에 직접 투입하여 수행하는 것을 禪宗 또는 불심종이라고 한다. 따라서 ‘教’는 부처님의 말에서 비롯되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에서 근원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서산대사 휴정(休靜)은 『禪家龜鑑』에서 “世尊三處傳心者爲禪旨 一代所說者爲敎門 故曰禪是佛心 敎是佛語 (世尊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했다는 것은 선의 뜻이 되었고, 일평생(一代) 설법한 것은 교학(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곧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곧 부처의 말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이것을 말하고 있다.
⑵ ‘行解’이란 知解와 修行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불교의 認識的 부문, 곧 수행하는 사람이 지혜의 힘에 의하여 理論敎義를 了解하는 것을 解(解門)라고 하고, 實踐的 부문, 곧 그 了解한 것을 몸소 실천에 옮기는 것을 行(行門)이라고 한다. 이 둘은 수행하는 이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므로, 예로부터 解를 눈에 行을 발에 비유하여 知目行足이라고 한다.
이는 세존의 길을 바르게 걷기 위해 거쳐야 할 ‘信解行證’의 과정 중 ‘行解’를 말한 것이다. 즉, 세존의 가르침을 믿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信’이라 하고, 그 가르침의 핵심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을 ‘解’라고 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猛烈하게 수행하는 것을 ‘行’이라 하고, 어느 순간 깊은 통찰을 하게 되어 그 단계를 스승으로부터 인가받는 것을 ‘證’이라고 하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 비로소 세존의 경지에 이르러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⑵ ‘相應’에서 ‘應’은 ① ‘받다, 받아들이다’ ② ‘승낙하다, 응낙하다’ ③ ‘대답하다, 응답하다’ ④ ‘호응하다, 공명하다’ ⑤ ‘詩文에 화답하다’ ⑥ ‘부합하다, 적응하다’ ⑦ ‘대응하다, 대처하다’ ⑧ ‘지불하다, 제공하다’ ⑨ ‘감응하다, 징조가 들어맞다’ 등의 뜻이 있다.
佛典에서 ‘應’이 들어간 단어로는 ‘應供’, ‘心不相應行法’, ‘應病與藥’ 등이 상용된다. 
‘應供’은 ① ‘奉養을 받다’ ② ‘석가여래 十號의 하나로 梵語 Arhat의 義譯이다. 일체의 번뇌를 끊어서 하늘과 사람의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 등의 뜻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일체중생이 구제해 주십사하고 공양을 올려 요구하는 것에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應病與藥’은 ‘병에 따라 적당한 약을 주다’ 즉 부처가 衆生의 처지에 맞게 갖가지 설법으로 교화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중생들이 병을 고쳐 주십사하고 요구하는 것에 호응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또 ‘心不相應行法’이란 ‘마음(心)과 상응하지 않는(不相應), 行蘊에 속한 法’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色(물질)도 아니고 心(마음, 심왕)도 아니고 또한 心所(마음작용, 의식작용)도 아니지만 實在하는 구체적 존재, 즉 法인 것들을 통칭하는 낱말로, 이러한 법들의 그룹(位)을 말한다. 말하자면, 물질적 감각 기관(5根)에 의해 감지되지도 않고 마음과 함께 일어나지도 않는 것들, 예를 들어, 현상들 사이의 관계·작용·성질·세력·명칭 등을 말한다.
⑶ ‘善知識’이란 생사가 없는 도리를 了達하고 능히 범부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고 이끄는 자로, ‘導師’나 ‘善友’라고도 한다. 
⑷ ‘傳燈錄’은 『景德傳燈錄』의 속칭이다. 모두 30권으로 宋 道原이 지었다(1006년). 과거 七佛로부터 역대 선종 조사를 5派, 52世의 得法 機緣, 傳法, 法系의 차례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이름이 오른 조사는 모두 1712분이다.
상기의 설명들을 참고하여 해석을 아래와 같이 확정한다. 
【飜譯】부처님의 心宗(禪宗)을 깨달아, 行하는 것과 아는 것(解)이 서로 어울려(知解와 修行이 兼全하여),  커다란 善知識이 된 분들은, 이름이 傳燈錄에 실려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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