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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狂如 안재철 교수의 육조법보단경 읽기 [9]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1.2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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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 門下에서] 馬祖와 石頭가 나와서, 기틀과 지혜가 원만하고 밝았으며,
[馬祖와 石頭의] 玄風이 크게 떨쳐 일어났으니,

 

故로 出馬祖와 石頭ᄒᆞ야 機智╷ 圓明ᄒᆞ야 玄風을 大振ᄒᆞ니 諺解】馬祖와 石頭왜 나 機智╷ 두려이 ᄇᆞᆯ가 【機ᄂᆞᆫ 體오 智ᄂᆞᆫ 用이라】 玄風을 ᄀᆞ자ᇰ 뮈우니 (馬祖와 石頭가 나와서 機智가 둥글게(온전히) 밝아 【機는 體이고, 智는 用이다.】 玄風을 크게 움직였다(떨쳤다.)
故로 出馬祖와 石頭ᄒᆞ야 機智╷ 圓明ᄒᆞ야 玄風을 大振ᄒᆞ니 諺解】馬祖와 石頭왜 나 機智╷ 두려이 ᄇᆞᆯ가 【機ᄂᆞᆫ 體오 智ᄂᆞᆫ 用이라】 玄風을 ᄀᆞ자ᇰ 뮈우니 (馬祖와 石頭가 나와서 機智가 둥글게(온전히) 밝아 【機는 體이고, 智는 用이다.】 玄風을 크게 움직였다(떨쳤다.)

 

【解說】⑴ 南嶽의 門下에서 馬祖가 배출되고, 靑原의 문하에서 石頭가 배출된 것을 말한다. 
⑵ 機智: 언해에서는 ‘機’는 體이고, ‘智’는 用이라고 했다. 『大乘起信論』에서는 體·相·用을 말하는데, 대체로 ‘體’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중심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말하고, ‘相’이란 눈에 보아 드러난 모습을 말하며, ‘用’이란 體가 드러난 실체 등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에서는 六祖의 문하인 南嶽과 靑原에게서 나온 馬祖와 石頭 등의 사람됨의 근본인 기틀(機)과, 그들의 작용, 즉행위의 일종인 智慧(智)가, 깨달음의 경지인 圓明에 이른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⑶ ‘機’에 대하여, 누구도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말을 늘어놓겠다. 흔히 ‘理氣’라고 할 때, ‘理’는 우주의 본체(또는 그 원리라고 해도 좋다)를 말하고, ‘氣’는 그 현상(물자체와 같은 말로 사용한다)을 말한다고 한다. 사실 현상으로 드러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닐 터이니, 그것의 시작에 해당하는 것을 ‘氣’라고 한다.
點보다도 작은 것이 폭발하여 우주가 생기니, 최초에 생긴 물질을 ‘氣’라고 한다. 氣가 오직 하나라면 지금까지 세상에는 오직 그 하나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온갖 만물이 있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반드시 서로 다른 둘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서로 다른 그것들을 각각 ‘陰·陽’이라고 분리하여 말한다. 서로 다른 陰·陽이 각각 두 개의 陰과 하나의 陽, 또는 세 개의 陰과 두 개의 陽 등등,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게 조합되어, 서로 다른 수없이 많은 것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만물이 이루어졌으니, 그 드러낸 만물의 처음이며 근거가 바로 ‘氣’이다. 또 ‘根’은 어떤 것의 뿌리를 말한다. 
위에서 말한 ‘機(기틀)·根(뿌리)·氣(形而下인 만물의 시작)’ 등의 발음의 初聲이 모두 ‘ㄱ’이니 예사롭지 않다. 
한자에는 발음이 유사하고 뜻도 유사한 것이 많다. 반문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其·豈·遽·渠·詎’ 등과 같이 초성이 ‘ㄱ’이거나, ‘何·胡’ 등과 같이 초성이 ‘ㅎ’인 牙音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부정을 나타내는 경우는 ‘不·弗·否’ 등과 같이 초성이 ‘ㅂ’이나, ‘無·毋·勿·莫·靡’ 등과 같이 초성이 ‘ㅁ’인 脣音의 글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단지’라는 범위를 나타내는 글자로는 ‘徒·多·特·但·獨’ 등과 같이 초성이 ‘ㄷ’이거나, ‘啻·鮮’ 등과 같이 초성이 ‘ㅅ’이거나 ‘第(弟, 地)·祗·專·止·直·才·只·子’ 등과 같이 초성이 ‘ㅈ’인 舌音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보다’류의 동사 중 ‘看·見·觀’ 등은 초성이 ‘ㄱ’, ‘示·視’ 등은 ‘ㅅ’인 것을 근거로 하여, 각각 주체가 보는 것에 초점을 두면 ‘ㄱ’류이고, 보는 대상에 초점을 두면 ‘ㅅ’이라고 할 수 있으니(이에 대한 것은 필자의 주장이다), 어찌 이것을 결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의 설명을 통하여 ‘機’가 體이며, 성품의 근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⑷ ‘圓’이란 圓滿하여 增減이 없는 平等無礙한 경지이다. 즉 究竟에 이른 깨달음의 경지를 형용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대정장29, p.525c21)에서는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원만하여 결함이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고, 『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대정장11, p.346c3)에서는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선남자야! 만약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원만이다. 어찌하여 원만이라 하는가? 만약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 수 없으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만약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분별이 없게 된다. 만일 분별이 없어지면 증감이 없고, 만약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약 色이 평등하다고 여기면, 곧 色이 원만하고, 受·想·行·識과 모든 법이 원만한 것도, 역시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
⑸ ‘明’이란, 티끌이 가득한 거울에서 티끌을 걷어내면 맑은 거울이 드러나듯, 無明에서 무명의 원인이 되는 執着 등을 걷어내면 그것이 곧 ‘明’이지 않겠는가?
⑹ ‘明’은 ‘眀’과 같은가? 다른가? 이 책의 뒷부분 “經誦三千部╷ 曺溪一句에 亡콰ᅌᅵ다 未眀出世旨어니 寧歇累生狂이리오… ”(“經을 三千번 외우는 것이, 曺溪의 한 마디에 [한 가닥의 功德조차도] 없어졌네. [부처님께서] 出世하신 뜻을 아직 밝게 보지 못했거니와, 어찌 여러 生 동안에 한 미친 짓(妄念)을 그칠 수 있겠는가?…”)과 “自性에 具三身ᄒᆞ니 發眀ᄒᆞ면 成四智니라 …”(“自性에 三身이 갖추어져 있으니, 밝게 보면 四智가 이루어지나니, …”) 등에서는, ‘明(日+月)’을 ‘眀(目+月)’이라고 쓰고 있다. 
‘眀(밝게 볼, 밝을 명)’은 ‘明(밝을 명)’의 異體字라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明’을 쓰는 데에도 불구하고, 굳이 『說文解字』에는 보이지 않고 1066년에 편찬된 『集韻』에 이르러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眀’을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대상이] 밝다’라는 것보다 ‘[주체가 대상을] 밝게 본다’는 것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明             ㅁㅁㅁ     ’은 ‘창과 달의 모습으로 달빛 아래의 밝은 모습’을 그렸으며, ‘眀’은 그것에서 ‘창’을 ‘눈’으로 바꾸어, ‘눈으로 그와 같이 밝은 것을 보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보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물을 보거나 듣거나 하여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쓰는 용어와 대상을 중심으로 하는 용어가 구분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⑺ ‘玄風’의 ‘風’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가르침(敎也)이자 교화이다. 『論語·顏淵』에 의하면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군자-지도자-의 덕은 바람이요, 백성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백성이 지도자의 德에 훈습되는 것을 나타낸다. 
⑻ ‘玄風’에서 ‘玄’은 흔히 道家에서 쓰는 것으로 佛家의 깨달음에 해당하는 말(格義佛敎)이며, ‘風’은 ‘德’과 유사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玄風’은 六祖로부터 南嶽과 靑原을 거쳐 나온 馬祖와 石頭의 깨달은 성품이나 기풍 등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언해가 ‘玄風’을 목적어로 간주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되며, 마땅히 주어로 간주하여 “[馬祖와 石頭의] 玄風이 크게 떨쳐 일어났으니”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해석은 위의 것들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飜譯】그러므로 [그 門下에서] 馬祖와 石頭가 나와서, 기틀과 지혜가 원만하고 밝았으며, [馬祖와 石頭의] 玄風이 크게 떨쳐 일어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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