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9) - 신장 위구르자치구 쿠차(庫車)의 키질(克孜爾)과 쿰트라(庫木吐拉)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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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9) - 신장 위구르자치구 쿠차(庫車)의 키질(克孜爾)과 쿰트라(庫木吐拉) 석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3.2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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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1994년, 탄생 1650주년을 기념하여 키질 석굴 입구에 세운 삼장법사 구마라집 동상
(사진 1) 1994년, 탄생 1650주년을 기념하여 키질 석굴 입구에 세운 삼장법사 구마라집 동상

 

오늘날 우리가 읽고 암송하는 대부분의 불교 경전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진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인도 또는 중앙아시아 언어로 쓰인 것을 역번역가가 한문으로 옮겨 중국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대부분 경전은 중국을 통해 들어왔고, 한글이 만들어진 다음에는 한문 경전이 한글로 번역되었다. 이처럼 경전이 역경자에 의해 번역되다 보니 전달하는 데 차이가 날 수도 있었다. 대승불교 시대에 만들어진 뛰어난 논서인『대승기신론』처럼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다 보니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책은 그 내용이 어렵다보니 그 내용을 쉽게 풀이한 해석서도 여럿 전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원효 스님이 쓴『대승기신론소』이다. 불교 경전을 삼장(三藏, Tripitaka)으로 분류하는데, 부처님의 말씀과 제자들이 듣고 받아 적은 글인 경(經), 불교의 여러 가지 규칙과 의식을 설명한 율(律)과 경과 율에 대해 후대 제자들이 쉽게 풀이한 글인 논(論)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를 합해 삼장이라 부른다. 이러한 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삼장법사라 하는데 당나라 때 인도에 가서 경전을 가지고 와 번역한 현장(玄奘)이 있고, 현장보다 더 이전에 삼장법사로 알려진 이가 있었으니 바로 구마라집(344-413, 鳩摩羅什, 구마라습, 구마라십, 쿠마라지바 등으로도 쓰임, 사진 1)이다. 그는 오늘날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오아시스 도시 중 하나인 쿠차(庫車) 출신이다. 1994년 쿠차에서는 그의 탄생 16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동상을 키질석굴 입구에 세웠다.

(사진 2) 무자트 강과 연결된 쿰트라 석굴
(사진 2) 무자트 강과 연결된 쿰트라 석굴

 

쿠차는 작은 도시지만 당나라 때『왕오천축국전』의 저자인 신라승 혜초(?-755)가 지나갔던 곳이고, 고구려 출신 장군인 고선지(704-787)가 토번군을 점령했을 때 머물렀던 곳이어서 우리와 무관하지가 않다. 바닷길로 인도에 갔다가 육로로 중국에 돌아온 혜초는 ‘나는 새도 무서워하는 천길 벼랑길’을 지나 쿠차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들보다 일찍 이곳을 지난 당나라 현장이 이곳에 왔을 때는 쿠차 성문 밖 좌우에 90척(약 27미터)의 불상이 서있었고, 매년 추분 때가 되면 열흘 동안 승려들이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서 재를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매달 보름날과 그믐날에는 왕과 대신이 국사를 의논하고, 결정 사항을 최종적으로 당대 최고의 고승에게 물어본 후에 선포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지역을 다스렸던 왕들이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불교 사원과 탑, 불상이 많았다. 
이러한 쿠차에서 태어난 구마라집은 출가한 후 인도로 유학 가서 여러 방면에 대해 공부를 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 전진과 후진의 왕들이 그를 국사로 삼아 경전을 번역케 했다. 총 300여 권의 불경을 번역했는데 번역이 뛰어나 오늘날까지도 그의 글이 이용된다. 그가 번역한 경전 중 유명한 것으로는 불설아미타경, 마하반야바라밀경, 묘법연화경, 유마경, 중론, 대지도론 등이 있다. 불교 경전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시기에 많은 경전을 번역함으로써 중국과 동아시아 불교에 깊이를 더하는데 기여하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극락(極樂), 색즉시공(色卽是空) 등의 용어도 그의 번역에서 비롯되었다. 후에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많은 경전들을 번역하였지만 구마라집의 번역은 그때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는 413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고승전』에는 그가 임종하기 전에 “내가 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화장된 후에 그의 혀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사진 3) 쿰트라 제20굴의 둥근 궁륭천장에 그려진 불보살상
(사진 3) 쿰트라 제20굴의 둥근 궁륭천장에 그려진 불보살상

 

삼장법사 구마라집의 고향 쿠차는 그의 이름으로 유명해졌지만, 거기에 또 다른 명물이 있다. 도시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니 바로 쿠차라 하기 어색하지만 인근에 도시라고는 쿠차가 유일하니 쿠차를 대표하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키질(克孜爾) 석굴과 쿰트라(庫木吐拉) 석굴이다. 아름다운 불교 벽화로 유명한 키질 석굴은 쿠차에서 서쪽으로 60킬로, 쿰트라 석굴은 서남쪽으로 30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키질 석굴은 3세기경부터 9세기 중엽까지 무자트 강과 연결된 계곡의 메마른 토산을 파고들어가 만들어졌는데, 현재 250개에 가까운 굴이 남아있다. 둥근 천장을 지닌 사각형 방에는 벽화가 가득 그려졌는데, 불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지만 열반도, 불전도, 본생도 등의 아름답고 다양한 벽화로 당시의 찬연했던 석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무자트 강 하류에 만들어진 쿰트라 석굴(사진 2)은 키질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굴 안에서 보는 강의 조망이 파손된 벽화와 불상으로 말미암아 가슴 아픈 순례객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키질과 쿰트라의 아름다운 벽화(사진 3)와 불상들은 12세기 이후 이 지역에 중심 종교로 자리한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우상이라고 훼손되었고, 그림의 눈을 보면 영혼을 빼앗긴다며 불, 보살의 얼굴이 파헤쳐졌고, 그림의 안료가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해준다는 가짜뉴스에 농부들이 그림을 긁어내기도 했다(사진 4). 그리고도 보존된 벽화들은 다시 20세기 초 독일과 러시아, 일본의 탐험대들에 의해 만신창이 되었다. 특히 독일 탐험대장 르콕은 투르판의 베제클릭 사원에서 엄청난 양의 벽화를 뜯어낸 후 이곳 키질 석굴까지 손을 대었다. 키질 석굴의 벽화들은 청색을 발하는 비싼 코발트 안료가 짙게 칠해져서 다른 지역의 벽화보다도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르콕 자신이 “이전의 어떤 것보다도 훨씬 훌륭하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도 그럴 것이 648년 당나라가 이쪽 지역에 안서도호부를 세우기 전까지 쿠차는 중국의 통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키질 석굴의 이른 시기의 벽화들은 중국 영향이 거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다. 당나라가 지배하면서는 한족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당나라가 쇠퇴한 후에는 이 지역을 지배한 위구르족의 독특한 특징이 반영된다. 

(사진 4) 얼굴이 훼손된 아름다운 비천상
(사진 4) 얼굴이 훼손된 아름다운 비천상

 

키질석굴을 얘기할 때 빼놓은 수 없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인 한락연(韓樂然)이다. 연변 출신으로 유럽 유학한 후 르콕이 쓴「신장문화보고기」와 영국인 스타인이 지은「서역고고기」를 보고 키질 석굴에 매료되어 1946년 키질에 들어왔다. 직접 벽화를 본 후 다음해 제자들을 데리고 와서 벽화를 모사하고, 발굴, 촬영, 연구, 기록 등을 진행했다. 안타깝게도 1947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해 자료가 많이 소실되었지만 그간 머물던 10호굴에는 그의 초상화가 남아 사람들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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