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의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 - 고행림(苦行林)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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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 스님의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 - 고행림(苦行林) 수도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1.03.31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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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탓 루앙사원 벽화
라오스 탓 루앙사원 벽화

 

싯다르타는 다시 길을 나서 마가다국을 거쳐 여기저기 방랑하다가 마침내 네란자라강 근처에 있는 우루벨라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마을 어귀에 있는 숲속에서 고행하고 있는 바라문(婆羅門)과 사문(沙門)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곳은 수행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으므로 싯다르타는 거기에 자리를 잡고 고행을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깊은 명상에 잠겨 순수하고 겸허한 마음을 찾았다.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하였으며, 자신이 태어나고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신체에 대한 집착과 정신적 속박, 탐욕을 버리고자 혹독하게 고행하였다.
그래서 몸은 무척 수척해졌다.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서까래 같았다.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처박고 넘어졌다. 살갗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혀 나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 싯다르타 태자는 곧 죽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고행을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의 어떤 수행자도, 미래의 어떤 수행자도 자신과 같은 고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실 만큼 고행에 몰입하였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생활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행을 한 사람은 신비하고도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6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었고,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고행을 포기하였다.
이때 싯다르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수행자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하나는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에 탐닉하여 욕망과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이 찬탄하는 것이며,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에 무익한 것이다.

스리랑카 칼루타라 사원 벽화
스리랑카 칼루타라 사원 벽화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열중하여 고행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된 것으로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모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찾았다. 중도는 곧 양극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결코 양극단을 적당히 절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 중(中)이란? 곧 바름이다(中者正也) 라고 하였듯이 중도란 곧 정도(正道)의 다른 말이다. 쾌락과 고행의 가운데가 아니라 진실로 바른길을 뜻한다. 따라서 고행의 포기는 출가 수행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나 관습까지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수행자들로부터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람은 부처님을 타락하였다고 비난하며 떠났다. 그러나 부처님은 주저 없이 고행을 포기했다.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생애에는 위대한 포기가 몇 번이나 있다.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왕위(王位)를 포기했고, 행복과 안락이 보장된 가정을 떠났으며, 모두가 믿는 당시 최고의 사상을 포기했다. 최고의 고행자라는 명예도 포기했다. 이것은 세상 전부가 자신을 외면할지라도 참된 것이라면 주저 없이 결단을 내리는 참된 수행자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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